개혁주의 기독교 세계관 (마이클 호튼)-2
본문
3장 기독교와 학문: 일반 은혜의 가치와 한계
* 철학을 계속 공부할 것인가? 성경공부를 할 것인가?
* 테르툴리아누스: 이단을 만드는 주범은 철학. 아우그스티누스: “모든 진리는 하나님의 진리”
* 종교개혁가들: 영적 지혜와 세상의 지혜를 혼동하는 태도를 지적
창조의 가치
* 성경: 하늘의 일과 땅의 일을 혼동하는 태도를 피하라. 땅의 일을 피하라는 것이 아니다.
* 영지주의의 입장(악은 물질에 속함, 구원은 물질로부터의 구속)을 경계시킴
* 복음주의는 실용주의, 공리주의, 소비자중심주의에 신세지고 있다.
(1) 땅에 속한 문제
-혼동하면: 이 세상의 문제/일을 과소평가하게 된다.
-“성경은 인생의 모든 문제를 위한 백과사전이 아니다.” (86p)
-칼빈도 고대인들의 탁월함(하나님께로부터 비롯됐음)을 인정했다.
(2) 하늘의 소망
-혼동하면: 하늘에 속한 일을 사소한 것으로 만들기도 한다. 일상을 무시한 책, 하나님을 우리의 추론을 통해 우리의 경험으로 끓어 내림
-“성경이 당뇨병 치료에 불충분하다고 말하는 것은 성경이 불완전하다는 말이 아니다... 성경은 인생을 위한 실용적인 조언이나 비법을 수록한 마법서가 아니다.” (90p)
-일반학문의 도움을 받아라. 기독교적으로 만들려고(혼동)하지 마라. 양자의 한계를 인정하라
모든 생각 사로잡기
* 바울이 공격한 것은 철학 자체가 아니라 이 세상의 지혜가 신학을 지배하는 동향이었다.
* 적군은 불신자나 제도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왕좌를 주장하는 모든 사상이나 주장이다.
변증학
* 바울은 현세적 세계관에 담긴 진리를 이해하고 활용(합의의 발판)하지만, 그런 다음에는 성경을 근거로 삼아 잘못하고 있는 생각을 비판했다.
* 현세적인 지성을 무시하는 태도를 조심하라.
두 가지 위험 피하기
(1) 사람의 지혜에 담겨있는 약속과 위험을 묵사하는 태도 (종교적 정화가 반드시 표요한 것이 아니다.
(2) 성경과 충돌하는 순간, 현세적인 사상이 자신의 사고방식과 생활양식에 영향을 끼친다는 사실에도 주의해야 한다.
* “칼빈의 경고대로 세상의 일을 경멸한다면 경멸하는 태도는 자기 원수에게도 일반 은혜의 선물을 부어 주시는 성령의 인격을 크게 모욕하는 처사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100p)
* “기독교인은 일반 은혜의 분야에 반드시 종사해야 하지만, ‘되찾거나’ 회복하려는 목적에서가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이 부여하신 소명으로 세상을 충만하게 하려는 목적에서 종사해야한다.” (102p)
4장 기독교와 예술1: 기독교 예술이 존재할 수 있는가
* 교회에서 성가대로 활동하게 된 오페라가수
* 바흐의 작품은 교회 안팎에서 인정을 받았다.
* 예술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활동은 “세상적”인 것인가?
* 오늘날 대중적 찬송의 인간중심성, 예배를 자기표현으로 생각하는 현대인
* “창조와 일상적인 것과 현세적인 것은 교회나 교회의 복음 전도 사명에 유용한지의 여부와 상관없이 모두 하나님의 복이다.” (110p)
예술의 척도
* 훌륭한 예술과 저급한 예술을 판단하는 성경적 기준은 없다.
* 예술의 일차적 목적은 즐기고 즐거움을 주는 것이다.
* 예술가는 과학자와 다르게 자신의 우주관을 ‘해명’할 필요가 없다. 논리적일 필요는 없다.
* 주관적 작품은 “비유”에 해당된다. 비유라고 하여 진실성이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기독교 예술
* 서양의 고전 작품은 기독교인이 저자라 할지라도 그냥 고전문학으로 분류된다. 우리의 예술이 이류가 될 때 우리는 특별한 영역을 만들어 기독교 공동체에 기여한다고 합리화하게 된다.
* “미술과 문학은 오직 순수한 오락만을 목표로 할 때 건강해 질 수 있으며, 그렇지 않으면 종교적 진리나 적어도 윤리적 진리의 시녀가 될 것이 확실하다.” “교화라는 목적을 의식하면서 거기에 직접적으로 예속되는 시는 저급한 시가 되기 마련이다.” (C.S.루이스, 119p)
* 기독교인도 대중음악을 즐길 수 있지만 그것을 예배에 받아들이는 것은 다른 문제다. 예배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방법(양식)을 따라 드려져야한다. 복음을 전하기(대중화하기) 위한 목적으로 “기독교음악”이 만들어지고 예배에 사용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 “예술을 은혜의 수단(말씀과 성례)과 혼동할 때, 우리는 예술과 은혜를 모두 손상하는 모순을 범하게 된다.” (122p)
* “종교개혁은 거룩과 세속의 구분을 거부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이 더욱 가치 있게 여기시거나 영적으로 더 기뻐하신다는 식으로 거기에 덧붙여진 상하 질서를 거부했다.” (122p)
* 중세시대는 거룩한 것이 선한 것이고 범속한 것은 악한 것이며, 기독교적 업무에 전적으로 종사하는 사람이 영적인 기독교인이라고 가르쳤다.
* 교회와 세상은 전혀 다른 두 목적에 기여한다. 교회는 하나님을 경배하며, 복음을 전한다. 세상(문학도 예술도)은 결코 속죄의 수단이 될 수 없다.
기독교 소설
* 영적인 의도가 담긴 이야기 소위 “기독교” 소설들은 저급한 신학인 동시에 저급한 문학을 만들기도 한다.
* 소설은 기독교적인 성경을 명시적으로 나타낼 필요가 없다. 이는 예수님의 비유가 때로는 해설 없이 하나의 독립된 이야기가 될 수 있는 것과 같다.
* 작품의 훌륭함이 있다면 그것이 기독교적 메시지를 지녔든 그렇지 않든 (비기독교인들에게도) 작품으로서 인정을 받는다.
범속함과 거룩함
* 종교개혁은 어떤 면에서 범속함과 거룩함을 구별했다. 그렇다고 하여 범속한 것이 하나님께 전혀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 아니다.
* 이러한 혼동으로 교회 음악은 범속하지도 않고 거룩하지도 않은 대중음악의 양식을 만들어 냈다.
* “구속보다는 창조가 예술 활동에 어울리는 신학적 근거임을 인정하면서 문화에 참여하는 태도가 기독교인에게 필요하다.” (135p)
* 오늘날 “찬양과 경배”의 찬송은 개인의 주관적 감정에 치우쳐 있다. 이는 예배에 합당하지 않다.
* 종교(예배)음악은 개인의 즐거움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는데 사용되는 것이 기에 일반 음악과는 다른 기준으로 분석해야 한다.
5장 기독교와 예술2: 신자의 삶에서의 예술
* 예술 분야는 비록 실용적인 분야와는 다르더라도 그런 이유 때문에 예술 분야를 궁극적인 적과 혼동해서는 안된다.
* 아름다움은 사람의 존재에 중요한 부분이며 하나님의 창조물을 감상하는 것은 기독교인에게 정당한 일이다.
예술 이해하기
* 대중(서민)을 위한 오락과 즐거움이던 예술이 현대에 와서는 엘리트집단을 위한 것이 되었다. 예술(미술, 음악, 소설 등)은 누구나 즐길 수 있는 것이다.
소설 읽기
* 소설을 읽음으로 우리는 다른 시간과 장소와 접촉하고 자신의 견해에서 넘어서 다른 세계를 이해하게 도와준다.
MTV 끄기
* MTV는 사고의 능력을 손상시키며 단순히 받아들이도록 만든다.
선과 진리와 아름다움
* 자연에는 어떤 ‘복음’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을 통해 구원에 이르는 법을 깨달을 수 없다. 위대한 예술 작품을 감상하는 일을 토애 별안간 즉각적으로 구원에 대한 해답을 통달하지 못한다.
* 문화상대주의 태도와 기독교 진리에 대한 태도를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 “기독교인은 예술가의 인품이나 종교적 헌신을 이유로 작품, 영화, 혹은 다른 예술적 표현을 거부하려는 움직임을 보일 때가 많지만, 예술가의 입장에 찬성하지 않고서도 예술을 즐길 수 있다.” (159p)
* 오늘날 대단히 많은 “기독교” 음악은 단조롭고 평면적이며, 반복적이다. 이는 복음주의 하부문화에서 얻는 것(경외와 심판의 상실)과 다르지 않다.
* "저급한 신학은 저급한 예술로 나아가며... 결국 진실성과 정직성이 부족한 '승리의 양식'만을 산출할 것이다." (16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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