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세계관이란 무엇인가(3)
본문
영성과 성경적 접근
제9장 영성에 대한 기독교 세계관의 접근
오늘 날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을 말할 때 가장 많이 사용되는 말 중 하나가 영성(靈性, spirituality)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 말을 사용할 때 주의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 말이 성경적인 의미로 바로 사용되기 보다는 성경과 다른 잘못 된 의미로 사용되어 그리스도인들을 현혹하거나 혼란에 빠지게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우리는 영(靈)이신 하나님 특히 성령 하나님과 연관 된 일을 말할 때 영성(靈性)이라고 한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도 영성이라는 말을 쓴다. 예를 들어 인도의 요가나 달라이 라마 등을 말할 때 영성(靈性)이라는 말을 쓰며 심지어 영매(靈媒)인 미국의 실비아 브라운이라는 여자는 “지금 전례 없이 영성(靈性)이 세상에서 성장하고 있으며 인류가 점점 더 영적으로 성장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정확한 의미를 알지 못하고 혼란스러운 가운데 매우 모호한 의미로 영성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 오늘 우리의 현실이다.
그렇다면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가? 그 대답은 기독교 세계관의 기본 틀인 창조, 타락, 구속, 극치라는 역사적인 틀을 적용해서 영성의 의미를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본 장에서는 이 같은 기독교 세계관의 기본 틀을 통해 영성을 이해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설명함으로 기독교적 영성(靈性)의 의미를 명확히 알지 못해 혼란스러워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고자 한다.
창조 받은 영성
1. 창조의 빛에서 본 영성
인간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은 영혼(靈魂)과 몸(肉)을 지닌 전인(全人)으로 영혼을 통해 하나님과 관계를 갖고 살아가도록 창조하셨다. 이같이 창조의 빛에서 보면 사람은 그 존재 전체가 하나님과 관련되어 있다. 즉 사람이라는 존재는 영적(靈的, spiritual)인 존재다. 여기서 우리는 잘못된 영육(靈肉) 이원론(二元論, dualism)을 극복할 수 있는 통찰력을 얻을 수 있다. 즉 인간의 영혼만 영적인 것이 아니라 창조의 빛에서 보면 몸과 영혼이 다 영적이라는 것이 성경의 중요한 교훈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영적(spiritual)이라는 말을 인간의 영혼만 연관시키는 것은 성경적이거나 기독교적인 것이 아니고 희랍적인 것이다. 피타고라스로부터 플라톤까지 희랍의 사상가들은 인간의 영혼만 고귀하고 물질적인 몸은 필요악으로 생각했다. 따라서 인간의 몸을 더럽게 여겨 이 더러운 몸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고귀하게 여겼다.(영지주의 이원론)
그러나 기독교적 이해에 의하면 인간의 몸 그자체가 악한 것이 아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인간의 몸과 영혼을 모두 선하게 창조하셨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 존재 전체가 선하고 고귀하다고 가르치며 따라서 전인(全人)이 영적 존재라고 선언한다. 즉 인간은 영육(靈肉) 단일체(單一體, psychosomatic unity)인 것이다. 그래서 기독교는 인간이 몸으로 하는 것도 영적(spiritual)이라고 선언한다. 따라서 기독교적 사물에 대한 이해에서 인간의 몸은 매우 중요하다.
사도 바울 당시 사람들이 “너의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제사로 드리라.”(롬 12:2)라는 사도바울의 말을 들었을 때 매우 놀랐을 것이다. 희랍적으로 사유하던 그들은 ‘영혼을 하나님께 드리라.”라는 말은 당연하다고 여겼겠지만 그러나 몸에 대해서는 “어떻게 더러운 인간의 몸을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가?” 하고 의문을 가졌을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는 인간의 몸과 영혼이 다 하나님의 피조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은 몸과 영혼이 다 거룩하다고 했고(고전 7:34), 하나님께 마음(영혼)뿐 아니라 헌신(獻身)할 것을 명했다.(롬 12:2)
그렇기 때문에 초대교회는 인간의 영혼은 선하나 몸은 악하다고 하며 따라서 영혼이 몸을 떠나가는 것을 구원이라고 주장한 영지주의(靈智主意, Gnosticism) 이단을 철저하게 배격했다. 그리고 인간에 대해 약간 비(非) 성경적이었던 오리겐과 달리 인간의 영육(靈肉) 모두를 강조하여 전인(全人)이 하나님의 형상이며 모두 영적일 수 있음을 주장했다. 이렇게 우리의 전인(全人)이 하나님과 긍정적으로 관련되어 있을 때 우리는 그것을 건전하고 바른 영성(靈性)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이를 ‘창조함을 받은 영성’이라고 할만하다.
이처럼 하나님의 선한 창조의 빛에서 보면 우리의 삶 전체가 영성으로 가득 차 있다. 왜냐하면 인간이 처음 창조 받았을 때 삶의 어떤 부분도 하나님과 적극적 관계에서 벗어나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영혼이 몸을 사용하여 하는 모든 것에 전혀 죄가 물들어 있지 않았고 하나님의 의도에 따라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는 것이니 그 모든 것이 영적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성경적인 올바른 영성이란 삶의 모든 것을 하나님과 건강하게 연관시키는 것이요 그렇게 할 수 있는 능력이다.
또한 하나님의 창조의 빛에서 보면 그야말로 인간의 삶의 모든 것이 다 하나님과 건강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하나님의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는 것이다.(딤전 4:4) 그러므로 타락 이전의 아담과 하와는 그야말로 모든 활동이 영적이었고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할 수 있는(고전 10:31) 영성이 충만했다. 즉 그들의 삶에 영적이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었다.
타락한 영성
2. 타락의 빛에서 본 영성
그러나 불행이도 아담과 하와는 이런 상태를 지속시키지 못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자신들의 의지(意志)를 주장하여 하나님이 원하시는 더 높은 상태로 나아 간 것이 아니라 오히려 창조함을 받은 그 상태에서 떨어져 타락하여 죄악과 그 결과로 인한 비참함 가운데 있는 존재가 되었다. 따라서 인간의 영성도 타락한 영성이 된 것이다. 이 세상에서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말하는 영성은 결국 이와 같은 타락한 영성의 각기 다른 표현들인데 그러므로 이는 하나님과의 잘못된 관계(mis-relationship)라고 표현할 수 있다.
이렇게 타락 전 온전한 사람이 하나님과 바르고 건강하게 관계하던 것과는 달리 타락 후에는 하나님과 관계가 뒤틀렸고 그 결과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상의 모든 만물과의 관계도 모두 뒤틀리게 된 것이다. 이렇게 타락한 인간은 때로는 일체의 신적(神的)인 것을 부인하고 이 세상과 자신들을 다 물질적인 것으로만 여기면서 이 세상에 대해서 완전한 세속적 해석을 하고 세상에 관련하여 세속적 관계를 유지해 가기도 한다.
또 때로는 이 세상의 어떤 피조물을 신격화하여 피조물을 하나님이라고 부르고 그것을 섬기며 살기도 한다. 그리하여 피조물을 섬기면서 그것에 헌신하여 자신을 희생하기도 하고 자신의 자녀들을 드리기도 하며 그런 우상에게 전적으로 노예처럼 복종하여 살기도 한다. “스스로 지혜 있다하나 어리석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 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롬 1:22,23) 이렇게 하나님이 아닌 것을 하나님으로 섬기는 것은 뒤틀린 영성의 대표적 표현이다.
또 어떤 때는 우상들은 다 인간들이 만든 것이라고 생각하여 이 세상을 지배하는 이법(理法)이나 고귀한 원리를 자신과 세상의 해석의 원칙으로 높이며 살아가기도 한다. 스토아 사상을 서구의 그런 사상의 대표적 예라고 할 수 있다면 불교는 동양의 그런 사상의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이 모든 것은 인간의 타락 때문에 나타나게 된 뒤틀린 영성(deformed spirituality)의 표현들이다.
타락으로 하나님의 형상이 뒤틀려지면서 그 한 부분인 영성에도 이와 같은 뒤틀림 현상이 일어난 것이다. 그것이 어떤 때는 매우 세속적 형태로 나타나기도 하고 또 어떤 때는 매우 신비한 형태로 또 어떤 때는 매우 종교적 형태로 나타나기도 하지만 그것들은 모두 다 성경이 말하는 참되신 하나님과의 건강한 관계가 아니고 바른 하나님 관계의 뒤틀린 표현들이다. 이런 현상들은 소위 종교 현상학으로 이 세상의 종교를 해석하면 이와 같은 뒤틀린 영성이 때로는 매우 천박하게 표현되기도 하고 때로는 매우 고상하게 표현되기도 한다.
오늘날 동서양을 막론하고 사람들이 선불교(禪佛敎)나 인도 사상의 영성 추구에 관심을 보이거나 세속의 삶에 지쳐서 영성을 갈구하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지만 결국은 이 같은 것들은 모두 다 온전하지 못한 영성 추구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회복 된 영성
3. 구속의 빛에서 본 영성
그러나 하나님은 타락한 인간을 그대로 버려두시지 않고 구원역사를 진행시켜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십자가를 통해 구속을 이루셨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구속의 빛에서 사람들은 다시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맺을 수 있게 되었다. 잃어 버렸던 존재가 제자리로 돌아와 다시 창조주요 구속 주이신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가지고 살게 된 것이다. 그렇게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관련하게 된 사람들은 이제 제대로 된 영성이 회복된다.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에서 나오는 모든 것들과의 긍정적인 관계를 프란시스 쉐퍼의 말처럼 ‘진정한 영성’ ‘참된 영성’이라고 할 수 있고 청교도들의 말처럼 ‘성경적 영성’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성경적 영성이라고 하면서 과거의 인습(因習)에 그대로 머물러 있다면 그것은 성경적 영성이 아니다. 참으로 성경적인 영성은 지난날 왜곡되고 뒤틀려진 영성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것이다. 이것을 변개한 영성(converted spirituality)이라고 하는데 진정으로 영성이 회복 된 사람들은 자신들이 변개하기 이전에 왜곡된 영성을 가지고 생각하며 표현했던 것에 긍정적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전에 자신이 생각하고 묵상하고 행한 바 전체를 버리고 그것을 부끄러워한다.
사도 바울은 거듭나기 전 자신이 추구하던 모든 것이 전혀 옳은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을 뿐 아니라 정 반대로 자신은 오히려 그리스도 안에서 전적으로 새로운 존재가 되었다고 자주 언급했다. 이처럼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옛 사람은 벗어버리고 전적으로 하나님과 새로운 관계를 가지고 살며 이 때 비로소 진정으로 영성이 회복했다고 말할 수 있다. 이처럼 옛 사람을 벗어버린다고 하는 것은 진정한 영성을 지니고 있는지 아닌지를 드러내는 시금석의 하나이다.
이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사람은 이전의 모든 것을 온전히 버리게 된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빌 3:7-9 상반) 단순히 중립적이거나 부정적 태도를 취한다는 것이 아니고 그것들을 역겨워하면서 완전히 버린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관점의 변화다. 이제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관점으로(from a perspective in Christ) 세상을 보기에 그리스도인이 되기 이전의 자기의 모든 것은 새롭게 판단된다. 여기에 바울적인 모든 가치의 전도(Umwertung der Werte)가 표현된다. 전에는 유익으로 생각했으나 이제는 해로운 배설물로 여긴다는 바울의 6절과 9절의 표현에 비추어 볼 때 ‘율법의 의(義)로는 흠이 없는 것’이지만 이제는 그것이 의가 되지 못한다는 고백이다. 그렇다면 타종교 안에서의 인간의 영적 힘씀은 무가치할 뿐 아니라 더 나아가 해로운 것으로 여겨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전의 영적 추구에 무엇인가 가치 있는 것이 있었고 그것이 오늘 하나님 앞에 바르게 세우는 데 도움이 된다는 생각은 이런 바울의 정신과 상당히 대립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변화 된 우리들은 끊임없이 성령님께 의존하여 노력하면서 우리의 모든 삶을 하나님과 바르게 연관시키는 영성의 온전함을 추구해야 한다.
4. 극치의 빛에서 본 영성
우리 영성이 철저한 의미에서 온전해지는 것은 역시 하나님 나라가 극치(極致)에 이를 때이다. 물론 성도가 죽어 그 영혼이 하나님과 함께 하늘에서 주님 재림의 때를 기다리고 있을 때도 모든 것이 하나님과 연관 된 온전한 영성의 상태이다. 그러나 우리의 몸과 영혼 전체 전인(全人)이 온전한 영성을 지니게 되는 때는 하나님 나라가 극치에 이를 우리 주님 재림의 때이다. 그때는 우리 몸도 게르할더스 보스의 말처럼 성령님이 쓰시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변화 된 온전한 영적인 신령한 몸이 된다. 그래서 그런 몸으로 하는 모든 것이 영적이 된다.
그러므로 우리의 현재의 모든 문화 활동도 하나님 나라 극치 상태에서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할 그 영적 삶을 기준으로 평가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현재 우리의 영성도 극치에 이른 온전한 영성의 빛에서 평가하려고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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