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세계관이란 무엇인가(2)
본문
(2) 사회적 존재로서의 인간
성경이 말하는 인간의 모습은 함께하는 인간이며 더불어 사는 사회적 인간이다. 하나님이 남자를 먼저 만드시고 여자가 그 남자의 일부로 만들어졌지만 성경의 본문은 남자와 여자의 동등성과 여자는 남자의 돕는 배필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즉 남자와 여자는 홀로 설 수 없고 반드시 남자와 여자가 서로 도와야 온전하게 되는 사회적 존재로 창조하셨다. 그러므로 남자와 여자는 하나님 보시기에 똑같이 중요하고 똑같이 귀하다. 이같이 사람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동등한 존귀한 자들로서 지음 받았다.
그러므로 인간이 상호 교제의 존재라는 것은 일차적으로 각 사람의 남자 됨과 여자 됨에 대한 충실성과 이로부터 기인하는 혼인 관계를 시사한다. 혼인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시고 서로 돕도록 하신 그 뜻에 순종하는 일의 한 측면이다. 사람은 이렇게 전인적으로 함께 살도록 창조된 것이다. 영적인 관계만이 아니라 정신적 심리적 관계 육체적 관계 모두 포함하는 것이다.
이 같은 인간의 모든 관계성은 또한 창조주 하나님과의 교제를 염두에 두신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모든 관계성은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전제하며 그것을 염두에 두고 있을 때에는 거룩하나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떠나면 추하고 더러운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교제의 존재요 함께하는 존재라는 것은 결국 모든 사람들에 대해 이웃이 되라는 하나님의 명령 아래 있는 존재들이고 이웃의 보호하는 자로 또 이웃과 함께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3) 통치와 문화적 존재로서의 인간
그렇게 함께 하면서 사람은 이 땅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교제하며 함께 산 결과로 아이를 낳는 것도 하나님의 축복의 일부분이고 그 결과로 사람들이 많아지는 것과 온 땅에 가득 차게 되는 것도 하나님의 축복의 일부분이며 그리하여 그들이 땅을 정복하고 온 땅에 있는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에 따라 다스리게 되는 것도 하나님의 축복의 일부이다. 그리고 이는 하나님 앞에 인간이 행할 사명이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가 알 것은 이 세상을 다스리고 통치하는 것이 하나님 형상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대로 통치함에서 하나님 형상이 드러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을 하나님이 생각하시는 대로 생각하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잘 다스려야 하는 사명을 가진 존재이다. 그리고 이 세상을 하나님의 뜻대로 잘 다스린다는 것은 결국 이 세상 문화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문화가 되게 한다는 의미도 있다.
3. 하나님의 형상의 기독교 세계관적 의미
(1) 진화론 거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 되었다고 하는 것은 인간이 다른 동물들로부터 진화되었다는 모든 개념을 거부하는 것이다. 인간은 진화의 산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존귀한 존재이다.
(2) 하나님을 반영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이 하나님을 세상에 잘 반영해야 한다는 것을 함의한다. 자신의 몸을 사용함에 있어서, 교제 관계에 있어서, 피조 세계를 하나님의 뜻에 따라 잘 다스리는 데 있어서 하나님의 형상됨은 인간의 큰 특권이면서 인간의 큰 의무요 과제이다.
(3) 하나님 의존적 존재
하나님의 형상은 또 그리스도인이 세상에서 마치 인간이 최고의 존재인 양 생각하는 인간 중심주의에 빠져서는 안 된다는 것을 시사해 준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중심이어야 한다. 인간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저버리는 것은 결국 자신의 근본을 저버리는 것이며 비(非) 인간화되는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을 의존하도록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기독교 세계관의 인식론적 토대
제6장 기독교 진리의 이해
1. 일반적 진리관
(1) 상응설(相應設, correspondence theory of truth)
인간의 머릿속에 있는 개념이 세상에 실재하는 것과 일치하면 참된 것이라는 입장을 취한다. 이것은 주로 경험론적 전통에서 강조되는 진리관이다. 그러나 상응설이 신뢰하는 인간의 감각은 과연 믿을 만한 것인가? 이 논리는 모든 것을 다 경험해 보지 않고서 이 세상 사태(事態) 일반에 대한 어떤 진리를 말하기 어렵다는 문제와 영혼의 존재나 하나님의 존재를 어떻게 확인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가 제기된다.
(2) 정합설(整合設, coherence theory of truth)
생각하는 관념과 명제들의 시작과 끝이 일관성을 가지고 내적 모순을 지니고 있지 않으면 그것은 진리로 여겨질 수 있다는 견해이다. 이 같은 정합설은 결국 어떤 진리 체계나 출발점을 전제로 하지 않을 수 없다. 처음 전제된 진리는 과연 어디서 그 근거를 찾을 수 있는가?
(3) 실천적 진리관
서로 다른 강조점을 지닌 두 가지 관점이 있다. 그 중 하나는 이 세상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은 별로 의미 없는 일이고 이 세상을 변화시키는데 도움이 되는 것만이 진리라고 주장하는 마르크스주의적 진리관이다. 또 다른 하나는 실용주의적 진리관으로 진리는 신념의 기능이나 역할에 따라서 결정된다고 주장하는 입장이다. 즉 다른 것을 고려하지 않고 현실의 문제 사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 그래서 인간에게 만족을 주는 것이 진리라고 간주한다. 이들의 입장은 결국 인간은 결코 절대적 진리를 획득할 수 없으므로 그저 신념의 가장 유용한 기능으로 만족해야 한다는 것이다.
(4) 실존적 진리관
이들은 모든 진리 문제를 실존문제로 환원하는 것이 아니라 일반적인 진리 주장이 적용되는 영역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인간의 실존 문제에 대한 진리는 다른 영역에서의 진리와는 다른 것이 작용해야 한다는 것을 주장한다. 즉 과학적으로 진리인 것이 실존적으로는 진리가 아닐 수 있으며 그런 때는 그것을 각기 서로 다른 영역에 대한 언급일 뿐이라고 보는 것이다.(이중 진리관)
2. 현대의 다양한 진리관
(1) 다중적인 진리관
여러 인간 집단이나 각 개인에 있어 각각의 영역에 대한 진리 주장이 다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견해는 결국 이 세상의 모든 영역에 적용될 수 있는 단일한 절대의 진리 체계란 있을 수 없다는 생각을 부추겼고 결국 상대주의적 진리를 허용하는 주장이다. 이 같은 주장은 하나님과 성경을 절대 진리로 믿는 기독교와 정면충돌할 수밖에 없다.
(2) 의사소통적인 진리관
사회 속에서 의사소통을 하기 위해서 같이 공유할 수 있는 것을 진리로 보고 합리적인 것으로 여겨야 한다는 주장이다.
(3) 포스트모던의 진리 이해
세상에 절대 진리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각기 진리라고 하는 모든 주장은 상대적일 뿐이며 늘 권력의 작용과 연관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따라서 이 세상에는 상대적인 진리만 있기 때문에 결국 누구나 각자 생각하고 주장하는 그것이 바로 진리가 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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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포스트모던 상황 속의 그리스도인
포스트모던주의자들은 인간의 이성으로는 절대적인 주장을 할 수 없다는 입장을 강조한다. 이것이 이전 세대의 사유보다 좀 더 겸손해 보일지는 몰라도 여기에 함정이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포스트모던주의자들이 그리스도인에게 요구하는 것은 기독교가 말하는 하나님이 계시고 그가 자신을 기독교적인 방식으로 계시하셨다는 그런 이해조차 절대적인 것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3. 진리에 대한 기독교적 이해
기독교적 전제는 하나님 자신과 하나님이 이 세상에 대해 생각하시는 바가 진리의 기준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피조물이 어떻게 하나님의 생각을 따라서 생각할 수 있을 것인가? 여기에 하나님의 자기 계시의 필요성이 대두 되며 하나님은 자연만물이라는 일반계시와 성경이라는 특별계시를 통해 하나님 자신의 존재와 생각을 인간들이 알 수 있게 하셨다. 하나님이 이 같이 하나님과 이 세상에 대한 계시를 주셨으므로 이에 근거해서 인간은 하나님과 이 세상에 대해서 피조물의 한도 내에서 비록 완벽하지는 않으나 바른 이해에 이를 수 있다.
(1) 타락 전 상태 인간의 진리 이해
창조에 깃들어 있는 일반 계시를 바르게 파악하여 사람이 하나님과 이 세상에 대한 피조물의 수준에서 바른 이해에 이를 수 있었을 것이고 따라서 하나님과 이 세상에 대한 진리를 소유하고 있었고 진리를 얻어 가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는 아담이 동식물들의 이름을 지은 것에서 이를 추론할 수 있다.
(2) 타락 상태 인간의 진리 이해
타락한 상태의 인간은 진리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비(非) 진리이고 진리를 추구하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그 자신이 진리에 반(反)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도 있으며 때때로 자신이 진리를 추구한다고 생각하며 진리 추구에 평생을 바치기도 한다. 그러나 실상은 타락 된 자신의 의식과 활동으로 진리를 억누르고 있다.(롬 1:18 참조)
그럼에도 인간에게는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있다.(롬 1:19) 칼빈은 이것을 신(神) 의식(意識)이라고 말했다. 신(神) 의식이 세상에 드러내신 하나님의 일반계시와 작용하면 바른 신(神) 지식이 나타난다. 그러나 타락한 인간은 신(神) 의식과 자연 계시에도 불구하고 결코 바른 신(神) 지식을 형성할 수 없다.
그러나 타락한 사람이 모든 것을 다 잘못 아는 것은 아니고 이 세상의 어떤 부분은 제대로 관찰하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일반은총의 작용으로 비록 기형적인 것이 되기는 했으나 잔존하는 하나님의 형상됨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이는 타락 후에도 자연법칙 등 창조 된 사물들의 변함없는 부분에 대해서는 아무리 타락한 자라도 부인하지 못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3) 구속받은 성도의 진리 이해
구원은 일차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뜻하지만 인간의 모든 인격적 활동의 회복도 다 포함한다. 중생한 사람은 이제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계시 내용을 옳고 바른 것으로 받아들인다. 중생한 이는 이제 하나님의 계시라는 시금석에 근거해서 자신들의 경험과 활동을 통제해 나가려고 한다. 이들은 이제 모든 것을 바르게 파악하고 해석하기 시작한다. 이런 활동은 일차적으로 신(神) 인식(認識)과 신학(神學) 활동에서 나타난다. 즉 하나님의 계시를 따라 신학(神學)하는 것이다.(계시의존 사색)
그러므로 구속 받은 성도는 어떤 분야의 학문적 활동을 하든지 결국 성경이 계시 하는 바 하나님과 진리에 대한 바른 이해를 가지고 그 토대 위에서 학문적 활동을 해야 한다. 이렇게 구속 받은 성도는 사고의 모든 분야에서 철저한 기독교적 사고를 하려고 해야만 한다.
이는 기독교인은 논리적 실수를 전혀 하지 않는다거나, 그 사유가 항상 바르다거나, 이 세상 전체에 대해서 항상 더 나은 이론을 낼 수 있다는 말이 아니다. 중생한 의식(意識)은 논리적으로는 타락 이전의 아담의 의식으로 회복된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도 철저하게 하나님의 특별계시에 서서 하나님의 일반 계시인 온 세상과 그 현상을 제대로 관찰하며 철저하게 사유(思惟)하지 않으면 실수도 하고 잘못된 해석도 하며 따라서 엉뚱한 결론을 내릴 수도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이해를 하나님의 계시의 빛에서 부단히 고쳐 나가야 한다.
4. 인식 과정에 대한 기독교적 이해
그러면 진리를 어떻게 알게 되느냐고 할 때 그리스도인은 과연 어떻게 대답해야 할 것인가? 기독교 인식론(認識論)은 존재론에 근거한 인식론이므로 하나님이 객관적으로 주신 계시(사물, 피조 세계 전체, 이에 대한 하나님의 해석으로서의 하나님의 특별계시 성경)에 대해 중생한 의식이 작용하여 하나님이 의도하신 세상을 바르게 인식(認識)하게 된다고 할 수 있다.
– 하나님이 모든 인식 활동의 존재의 원리이다.
– 하나님께서 객관적으로 주신 이 세상(일반계시)과 이 세상의 의미 와 방향에 대한 하나님의 계시인 특별 계시(성경)가 우리의 객관적 인식의 원리이다.
– 성령의 능력으로 중생한 그리스도인의 의식(意識)이 인식(認識) 활동의 주관적 원리가 된다.
이를 요약하면 기독교적 진리 이해는 하나님의 계시 즉 특별 계시와 특별 계시의 빛에서 해석된 일반 계시를 진리로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정의 할 수 있다. 따라서 하나님의 존재 그리고 그의 계시와 부합하지 않는 세계이해는 참된 것이 아닌 것으로 여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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