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이타닉호와 한국교회

작성자 외마
작성일 17-08-18 15:13 | 조회 627 | 댓글 0

본문

 1912414, 타이타닉호는 처녀항해 나흘 만에 1,500여명의 탑승객들과 함께 대서양 바닥으로 가라앉았다. 이 비극적인 이야기는 100년간 수많은 영화와 다큐멘터리와 음모론의 단골소재였는데, 이런 끊임없는 재생산의 배경에는 타이타닉호가 가라앉지 않는, 혹은 가라앉지 않을 줄 알았던 배라는 기대와 믿음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러나 타이타닉호는 출항 오전부터 빙산이 떠다닌다는 소식을 선박 사이의 무선통신으로 받았는데, 특히 침몰일인 414일에는 빙산 경고를 6통이나 받게 된다. 그러나 타이타닉호 통신사 잭 필립스는 승객의 통신 발신 업무에 쫓기고 있었고, 통신사들은 이 계절에서 북대서양을 항해할 때에는 자주 있는 일로 생각하여 빙산 경고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심각한 실수를 하였다. 또 빙산 경고를 선장에게 보냈지만 선장이 없어 항로를 변경하지 못했고 드디어 1912414일 밤 1140, 당직을 서던 갑판선원이 전방 450미터에 높이 20미터 미만의 빙산을 육안으로 발견하고 보고하였으나 신기술로 제작된 배의 조타법(구식은 왼쪽으로 가려면 조타휠을 오른쪽으로 돌림)에 익숙하지 않았는지 위기의 순간에 극도의 긴장감으로 인해 헷갈렸는지 배는 우현측면이 빙산과 충돌하고 말았다.

 

배의 아랫쪽 승객들은 큰 충격을 느끼고 잠에서 깨어났으나, 윗쪽 승객들은 약간의 흔들림을 느꼈을 뿐 잠에서 깨어날 정도는 아니었다. 충격을 느끼고 올라온 사람들이나 갑판 위에 있었던 승객들은 오히려 즐거운 분위기였다. 3등실 승객들은 갑판으로 올라와 얼음조각으로 축구를 하였다. 어떤 사람들은 기념으로 위스키에 쓸 얼음으로 가져갔다.

 

하지만 그때 6번과 5번 보일러실은 물이 폭포처럼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화부들은 물을 피해 도망갔다. 조타실과 망루에서는 빙산의 피해가 그렇게 크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었으나, 우현은 수면 아래로 약 90미터가 손상되어 뱃머리로 부터 5구획에 걸쳐서 엄청난 해수가 배 안으로 들어왔다. 방수격벽 탓에 배 전체에 물이 들어차지는 않았다. 하지만, 타이타닉은 2구획(뱃머리로 부터는 4구획)까지 물이 들어오면 침몰하지 않고 버틸 수 있으나 뱃머리로 부터 5구획 이상에 물이 차면 그 한계를 넘는 것이었다. 거기에다 타이타닉의 격벽은 위의 E갑판과 연결되어 있는 구조라 선체가 부력을 잃고 앞으로 기울어지며 잠기는 와중에 해수는 격벽을 넘어 차례차례로 다른 구획까지 흘러 들어갔고 이는 배의 침몰을 가속했다. 이후 뱃머리에 실린 물로 인해 배는 서서히 앞으로 기울었고 뱃머리가 해수면 아래로 점점 들어갔다.

 

스미스 선장은 배수 펌프로 해수를 밖으로 빼내려고 했지만 그저 조금의 시간을 버는 정도일뿐 침몰을 막을 순 없었다. 1245, 타이타닉 호는 조난 신호를 발신하고 인근 선박에 구조를 요청했다. 불과 20 km 정도의 거리에 정박중인 화물선 캘리포니안 호가 있었지만, 그 배의 한 명뿐인 통신사(캘리포니안 호의 통신사 에반스가 마지막 빙산 경고를 보냈을 때 타이타닉의 통신사 잭 필립스는 바쁘다면서 시끄럽게 하지 말라고 일침을 놓았다.)가 타이타닉의 통신사에게 일침을 듣고서는 더 이상 주변상황에 주시하지 않고 취침중이라 타이타닉 호의 긴급 신호를 받지 못했다. 이 일로 인해 타이타닉 사고 이후 무전을 상시 켜놓고 교대근무를 통해 무전사가 항상 대기하도록 하는 국제규약이 생겨났다. 90 km 떨어진 여객선 카르파티아 호가 조난 신호에 응답해 전속력으로 타이타닉이 있는 곳으로 향했지만, 배의 최대 속도가 17노트에 그치는 카르파티아 호가 현장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타이타닉호가 가라앉은 지 약 1시간 30분이 지난 새벽 355분이었다.

 

나는 이 역사상 최악의 해난사고의 모든 상황이 오늘 한국교회와 너무나 무서워 오금이 저려올 정도로 일치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우리나라에 복음이 들어 온지는 232년이 되었고 장로교가 들어 온지는 133년이 되었다. 기독교는 곧 저물어 가는 이 땅에 전해지자마자 희망이자 빛의 역할을 잘 감당하였다. 선교사들은 예수님을 증거하면서 가난과 억압에 신음하고 있던 조선의 백성들에게 학교를 세워 글을 가르쳐 미래를 밝혀주었고 또한 병원을 세워 그들의 보건과 위생에 눈을 뜨게 해 세대를 이어갈 수 있게 해 주었다. 1,000년 가까이 이어져 온 유교적 신분제도에 억눌려 있던 이 땅의 흰 옷 입은 백성들에게 한줄기 빛이 되어 그들을 계명(啓明)시켰음은 말할 나위도 없으며 일제로부터의 독립을 위해, 공산당의 침략에 맞서, 오랜 세월 가난에 짓눌려 온 이 나라를 위해 조국근대화의 기수로 앞장섰으며 기독교인은 특유의 성실함과 순종함 그리고 높은 교육열 등으로 똑똑하고 지혜로움의 대명사로 사회 각 분야의 지도자급으로 우뚝 설 수 있었다.

 

이는 교회의 부흥과 성장으로 이어졌으며 교회의 급속한 증가와 성장이 우리나라의 경제성장 곡선과 그 궤를 같이하고 있음을 부인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도 복을 받고 싶어서 자신의 자녀들이 신분상승의 주역이 되기를 바라면서 현실적 복에 신앙의 가치를 매겨가며 기복신앙의 구덩이를 지나 번영신학의 늪으로 몸을 버리고 말았다.

 

문제는 기존의 교회 성장주의에 활력을 제공해오던 전통적 오순절 운동과 은사주의 운동이 주춤하는 가운데 신사도운동이 성령운동의 계보를 이으며 체험적 신앙을 갈구하는 한국교회에 급속히 세력을 확산하고 있다는 것이다.

 

개혁주의에 입각한 교단과 신학자들은 신사도운동에 대해 강력한 신비주의적 체험과 사도성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며 이단시 여기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신학적 논란 속에서도 국내에서는 많은 교회의 목회자들과 성도들이(특히 목회자들 중심으로) 직간접적으로 신사도운동에 동참하고 있으며 그렇지 않아도 오직말씀이 훼손되어 가고 있고 오직 믿음바른 가르침인 정교 (Orthodoxy), 바른 감정인 정감(Orthopathy), 바른 실천인 정행 (Orthopraxis)이 말씀 안에서 통합되는 건강한 삶과 신앙이 되는 참된 경건이 실종된 외식하는 자들이 넘쳐 나는 현실에서 침체된 한국 교회의 살 길은 종교개혁이 아니라 교회개혁’, ‘목회자 개혁’, ‘신자개혁임을 주지하여야 한다. 말씀과 경건에 힘쓰기보다 프로그램과 이벤트에 더 방점을 찍는 행위는 분명 한국교회라는 배에 보내져 오는 위험신호이다.  

댓글목록 0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