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5 과 중세 교회의 경제문제

작성자 외마
작성일 17-09-02 07:42 | 조회 38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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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가 만일 불의한 재물에도 충성하지 아니하면 누가 참된 것으로 너희에게 맡기겠느냐(16:11)

 

 

중세에는 교회가 경제문제에 대해 어떻게 가르치고 대응했을까요? 또 중세 이후 자본주의가 발흥하고 발전하는 과정 속에서 자본주의를 뒷받침하고 있던 정신은 무엇일까요? 종교개혁을 통해 탄생한 개신교의 경제 윤리가 자본주의에는 어떠한 영향을 미쳤고 자본주의 정신과 개신교 윤리 사이에는 서로 어떤 상관관계가 있을까요?

 

막스 베버(Max Weber)<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자본주의 정신에 영향을 끼친 것이 바로 칼뱅주의와 이후의 청교도주의 등의 프로테스탄트 윤리라고 주장하였습니다.

사례 20) 중상주의(重商主義)

중상(重商)이란 상업(商業)을 중히 여긴다는 뜻으로 중상주의란 곧 상업을 중히 여겨 경제정책상 우선시하는 사상을 말한다.

16세기~18세기 중엽, 유럽의 절대왕정시대이자 자본주의 초기 단계인 상업자본주의가 형성되던 시기의 경제사상으로 15세기 말 지리상의 발견이후 식민지로부터의 물자유입과 국제적 교역이 증가하면서 자본주의 생산양식이 전 유럽으로 급속히 확대되었고, 이에 따라 당시 강대국들은 수출을 많이 하고 수입을 억제하여 무역차액을 극대화하는 것이 부국강병의 지름길이라 생각하고 정부 주도하에 식민지 개척, 수출장려 등 교역을 중심으로 하는 경제 정책을 펼치게 되었는데 이러한 일련의 정부주도의 교역중심경제정책을 가리켜 중상주의라 한다.

 

중상주의의 특징은

1) 배금주의(重金主義) : , 은 등 귀금속(금화,은화)이 곧 부()이라고 생각함.

2) 국가의 이익을 개인의 이익에 우선함 : 국가의 이익을 위해 개인의 이익을 규제하고, 정부가 이에 적극 개입하여 국부를 증가시켜야 한다고 봄.

중상주의는 강력한 보호주의 정책을 낳게 되었고 무역과 상품의 판매처 확보를 위한 식민지 확보 및 개발에 강대국들이 경쟁적으로 나서게 되었고 적극적인 식민지 수탈정책이 시행되었다.

 

종교로 사회를 지배한 암흑기의 중세 교회

중세시대에는 십일조가 법적인 의무로 받아들여지는 시기이다. 프랑크 왕국은 585년의 제2차 마콘(Macon)회의에서 십일조를 법적 의무로 선포하였고(5), 거부하는 자에게 파문을 위협하였다. 이것은 자발적인 십일조의 실천이 법적인 의무로 바뀌게 되는 사건이었다. 칼 대제(768~814)는 교회의 내적인 문제에까지 관여하면서, 그의 부친이 정한 십일조 의무를 779년에 프랑크 왕국의 국법으로 확정했다.

그 결과 교회의 재정이 튼튼해지게 되었으며 이때 거둔 십일조의 1/3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도록 규정하였다(루이 왕은 2/3를 규정). 다른 유럽 국가에서는 이보다 늦게 십일조를 도입하게 되는데, 가령 포르투갈은 11세기에, 덴마크와 아이슬란드는 13세기에 십일조의 의무가 법으로 정해졌다.

 

십일조 의무는 원칙적으로는 전 국민에 있었으나, 교회와 수도원, 성직자의 소유지 그리고 일부 귀족들은 그 의무에서 제외되었으며, 구약의 규정인 토지의 소산물과 가축의 소산뿐만 아니라 다른 개인 소득의 십일조를 포함하는 개념이 받아들여졌다.

 

16세기까지 중세 교회는 현대의 자본주의가 추구하는 물질적 부의 무제한적인 추구를 죄악시하면서 그 당시의 봉건제를 옹호했습니다. 중세 교회는 신적인 체계를 통해 모든 인간 생활을 영적으로 다스리면서도 봉건적 사회구조 속에서의 계급 관계를 유기체적 연대를 강조하는 사회 이론으로 정당화했습니다.

 

16세기 이전에는 대규모의 임노동자를 필요로 하는 산업이 발달하지 못했기 때문에 경제문제에 있어서 교회의 역할은 기껏해야 농부와 소상공인들에게 돈을 빌려 주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고리대금 문제와 상품에 대한 정당한 가격에 관한 문제 등을 다루는 것이 고작이었습니다. 즉 정당한 임금에 대한 문제보다는 정당한 가격과 고리대금의 문제 등이 가장 중요한 경제적 이슈였다는 것입니다.

 

당시의 경제는 소규모 자급자족 체계였으나 봉건적인 위계질서 속에서도 도시와 상업 경제가 성장하면서 경제적 이윤을 추구하려는 행위를 중세 교회는 도덕적 원칙에 따라 철저히 견제하고 다스리면서 세속은 여전히 교회에 종속되었습니다. 즉 근대 경제가 경제 행위에 대한 정당성을 경제적 편의에서 찾은 반면 중세 교회는 도덕적 권위를 더 우선시하였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중세 교회는 개인 간의 고리대금과 상품 매매 등과 같이 사적인 금전 거래와 상업 활동에서 발생하는 도덕적 문제에 대해서만 관여했고 제도나 구조의 문제는 건드리지 않았으며 교회의 도덕률과는 거의 무관하게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교회는 국제간의 금융 시장에서 벌어지는 금융 관행에 대해서는 침묵했으며 사실상 최대의 고리대금업자가 바로 교황청이었습니다. 아울러 교회는 최대의 지주로서 봉건제도를 불변의 사회질서로 옹호했습니다.

 

탐욕적이고 무능했던 중세 교회

교회가 기반하고 있는 물적 토대가 이러한 상태였기 때문에 중세 교회는 보수적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즉 세속 경제는 교회의 도덕률에 철저히 종속되어 지배당하는 것처럼 보였으나 오히려 교회 자체의 경제문제는 세속적이었고 자기 자신에게는 높은 도덕률을 적용하지 않는 위선자들이었습니다.

 

고리대금에 관한 문제나 농노제에 대한 문제는 개인적 차원에서만 다루어질 뿐 제도적 차원에서의 비판이나 개혁 운동으로는 결코 이어지지 않았다는 점이 중세 교회가 경제문제에 대해 취한 한계였다. 사실상 교회가 최대의 고리대금업을 하고 있었으며 농노가 중세 교회의 대부분의 부를 생산하고 있었기 때문에 농노 체제를 반대한 성직자는 거의 없었습니다.

 

아퀴나스를 포함한 거의 모든 중세의 신학자들은 농노제를 불변의 것으로 가정하고 옹호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독일과 영국에서는 농민들이 반란을 일으켰으나 국가와 한 몸인 교회는 이를 잔인하게 진압했습니다. 훗날 농노제가 폐지된 것도 기독교보다는 프랑스혁명의 인도주의적 자유주의에 많은 빚을 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이처럼 중세의 교회는 사적인 고리대금이나 상품 매매와 같이 개인적인 경제생활에 있어서는 윤리적인 훈계 등으로 세속을 다스리는 것처럼 보였으나 교회 자체가 세속적이고 위선적인 경제생활을 하였고 기존의 사회구조와 제도를 옹호하는 기득권이었습니다.

 

따라서 중세 교회는 전통적인 가치를 부인하는 것을 모두 악하게 규정하고 변화를 거부하는 보수성을 띨 수밖에 없었습니다. 또한 세상에서 벌어지는 새로운 경제문제들에 대해 어떠한 적절한 대응도 할 수 없는 무능력한 상태였다. 한마디로 중세 교회는 너무 탐욕적이고 무능력했습니다.

사례 21) 은행의 역사

은행의 역사는 바빌로니아의 함무라비 법전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갈 만큼 역사가 깊다.

인류사에서 가장 오래된 이 법전에는 은()을 빌려줄 경우와 곡물을 빌려줄 경우의 최고 이자율을 차등하고 있다. 중세에 들어서면 상업의 발달로 상인들이 국경을 넘어 다니며 많은 양의 물건을 거래해야 했지만, 화폐가 없었기 때문에 곤란에 빠지게 되었다. 해상무역이 활성화되고 상거래의 규모가 커져, 물물거래에는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상인들은 금, 은 같은 귀금속을 가지고 다닐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도적이었다. 도적뿐만 아니라, 국경을 넘나들 때 상인들이 가지고 있던 금은을 노리는 관리들도 늘어났다. 관리들도 유혹받기는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축적된 재산의 안전한 보관이었다. 상인이 축적한 자산의 규모가 급증하면서 그 재산을 언제라도 사업자금으로 바꿀 수 있는 유동성 재화로 저장하는 일은 부자 상인일수록 큰 숙원이었다. 상인들은 거래를 통해 생긴 이윤(귀금속)을 가장 믿을 수 있는 곳인 수도원에 맡기기 시작했다. 수도원은 상인들이 맡긴 돈을 안전하게 관리 해줄 뿐 아니라, 사실상 국가권력으로부터 벗어나 있었기 때문에 세금문제로부터도 비교적 안전한 곳이었다. 더구나 어떤 지역의 수도원에 맡긴 금은에 대한 보관증을 받으면 그 보관증을 들고 다른 지역의 수도원에서 금은을 인출 할 수 있는 지급결제기능이 작동 할 수 있는 곳이기도 했다.

 

물론 여기에는 약간의 비용이 들었다. 당시만 해도 수도원은 보관소의 개념이었을 뿐, 맡김으로서 이자를 받을 수 있는 장치는 아니었다. 하지만 중세 말기 이후 수도원의 권력이 약화되거나 수도원의 타락이 심해지면서, 상인들이 맡긴 자산의 안정성이 떨어지게 됐다. 심지어는 다른 곳에서 받은 보관증이 무용지물이 되는 경우가 발생했다. 게다가 도시의 발달로 인하여 시골에 있는 수도원의 입지는 은행으로서 점차 불리해졌다. 도시 안에서 떼이지 않고 자신의 귀금속을 쉽게 인출할 수 있는 저장소가 필요해진 것이다. 그 결과 생겨난 것이 민간저장소인 방카(banca) 였다.

방카는 당시 가장 상거래가 활발했던 이태리 베네치아의 유태인 지역인 게토에 살던 한 유태인이 방카라는 교환소를 열어 금과 은을 저장하고 필요시 돌려주는 역할을 시작한 것이 효시다. 그러자 다른 유태인들이 너도나도 이 사업에 뛰어들며 소위 은행의 기능이 비로소 시작된다. 셰익스피어가 자본과 법, 인륜 간의 이런저런 곡절을 다룬 소설의 무대로 베니스를 설정한 것은 다 이유가 있는 셈이다.

중세 교회의 경제적 부패와 종교개혁의 태동

16세기의 경제 혁명이 일어났던 당시에는 베니스 등의 이탈리아 도시가 점차 몰락하고 남부 독일의 도시들과 포르투갈과 스페인이 흥왕하기 시작했습니다. 중세의 농촌 사회는 농민전쟁의 여파로 몰락의 길을 걸었으며 광산과 섬유 등의 영역에서 자본주의적 기업이 발흥하여 상업적 기업이 국제적으로 흥성했습니다.

 

16세기는 유럽 문명의 구조 자체가 변화를 겪는 시기였으나 이런 상황에서 교회는 경제문제에 있어 기득권을 지키려 하면서 아무런 사회 개혁을 하지 못하는 무능력한 상태였습니다. 16세기 후반에 이르러서는 정치 이론과 사회윤리를 포괄하여 왔던 중세 교회의 신학적 틀이 무너지기 시작했고 중세 교회는 점점 더 세속화되었습니다.

 

이 당시에는 계시보다는 이성이, 종교적 권위보다는 경제적 편의가 점차 세속의 모든 문제들을 가르는 기준이 되어 갔다. 17세기에 이르러서는 민족국가가 종교에서 분리되고 세속 국가의 모양을 띠면서 사회의 이원성이 확립되었습니다.

 

그러면서 과거 중세 교회가 가지고 있던 사회적 기능들이 국가로 이전되었고 중세 교회가 주장했던 유기체적 질서 이론은 국가의 분리 가능한 기계적 사고로 대치되었습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교회보다 국가가 더 힘을 얻게 되고 국가는 문명과 번영의 수호자로서 우상화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교회는 사회문제와 사회도덕의 문제에 있어 최종적 권위로서의 위치를 잃고 말았습니다.

 

이처럼 근대 자본주의가 발흥하기 전후의 상황에서 중세 교회는 세상에 대해 아무런 대응을 하지 못하는 부패하고 무능력한 모습을 보이면서 그저 기득권을 지키기에 급급한 모습이었습니다. 이런 암흑 같은 시기에 일어난 종교적이고 사회경제적인 운동이 바로 종교개혁입니다.

 

 

생각하고 이야기해 보기

 

1) 중세시대 최대의 고리대금업자는 누구였습니까?

 

2) 자본주의의 정신에 영향을 끼친 것이 칼뱅주의와 청교도주의라고 주장한 사람은

누구입니까?

 

3) 중세시대의 경제사상인 중상주의에 대해 말해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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