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에 나타난 경제 윤리(1)

작성자 외마
작성일 17-08-27 10:42 | 조회 255 | 댓글 0

본문

기독교는 물질적인 진공상태에서 영적정신적인 것으로만 형성될 수 없는 것이기에, 크리스천은 경제와 그 활동에 대한 성경적 이해를 통해 바르고 평등한 경제 질서를 수립하는데 책임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물질적 영역은 정신적 삶의 목적을 수행하는 기본조건으로서 크리스천의 활동영역이다. 그러나 이러한 물질적 영역이 인간의 삶의 궁극적 의미를 실현시키기 위한 수단에서 벗어나서 오히려 궁극적인 목표로 변하게 된 것이 오늘날의 경제현실이다. 주객이 전도된 가운데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창조적 인간은 물질의 노예가 되고 부의 축적을 위한 억압과 착취가 만연하게 되며 자연이 피폐되어 고통 받고 있음 또한 우리의 문제이다. 이렇게 인간이 인간답지 못하게 살고 있는 경제현실 속에서 기독교는 정치사회문화 전반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경제문화에 대해서 신학적인 이해와 크리스천으로서의 결단을 새롭게 할 수 밖에 없다.

 

사회주의 경제체제의 착각이 자유는 혁명이 완수된 후에 자동적으로 온다.’는 것이었다면 자본주의 경제체제의 착각은 정의는 자유스러운 기업의 부산물로서 뒤 따라 온다.’는 것이었다. 어떤 특정한 문화나 가치의 기준, 어떤 경제기구나 경제적 대상을 절대화하려는 우상숭배를 극복하기 위해, 기독교인은 성경에 나타난 계시를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재해석하며 가치판단의 근거로 삼아야 한다. 우리는 정부가 유일한 고용자인 나라에서 정부에 반대한다는 것은 천천히 굶어 죽어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일하지도 않는 자는 먹지도 못할 것이라는 구시대의 원리는 명령에 복종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못할 것이라는 새로운 원리에 의해 교체되었다는 트로츠키의 말을 기억해야 한다. 동시에 자유시장경제의 목표는 이윤극대화 그 하나여서만은 안 된다. 첫 번째 문제는 무엇을 추구하는 가다. , 어떤 특수한 재화와 용역의 극대화인가? 어떻게 생산하며 어떻게 분배하여야 할 것인가를 물으면서, 이는 윤리적인 동시에 기술적인 문제이며 효율성의 문제인 동시에 정당성 및 공평성의 문제라고 한 시드니 서프린의 말도 함께 생각해보아야 한다. 이러한 두 소리에 공정하고 진지하게 귀 기울이며 이제 성경의 경제관에 비추어 교회 공동체가 경제제도에 대해 어떠한 소리를 내야 하는지 살펴보자.

 

1) 경제윤리의 의미

 

경제제도의 문제에 관심을 집중하고, 그것을 다루는 방법과 근거, 책임 있는 제도적 대안 모색

 

경제에서의 객관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의 통일시키려는 노력

 

경제에서 객관적인 것을 다루는 방법을 개발하고 경제에서 인간적인 것의 내용과 형식을 밝히고 이 둘을 서로 이어주고 연관시키는 관점 제시.

 

경제 활동과 관련된 생활 윤리, 또는 어떤 경제 체제가 추구하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필요한 규범 체계

 

경제 행위를 함에 있어서 "나는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라는 물음에 답하는 것.

 

 

2) 여호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가난한자 지향성 : 희년의 윤리

이스라엘이 이집트 노예생활로 고통을 받을 때 그들의 신음소리를 듣고 구원하셨던 여호와 하나님은 구약성경을 통해 가난한자, 억눌린 자, 포로 된 자에게 관심을 가지시고 그들의 상황에서 해방시켜 주셨다. 그리고 그들과 계약관계를 맺으시고 그들이 지켜야 하는 규례와 법을 주셨다. 그중에는 희년에 대한 선포가 있다.

 

제 오십년을 거룩하게 하여 전국 거민에게 자유를 공포하라. 이 해는 너희에게 희년이니 너희는 각각 그 기업으로 돌아가며 각각 그 가족에게로 돌아갈지며”(레위기 25:10)

 

예수도 그의 공생애를 시작하며 하나님의 사랑을 펴 나가기 위해서 , 부정의한 경제구조와 가난하고 억압의 굴레에 매여 있는 자들을 자유케하시는 은혜의 해를 선포하셨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누가복음 4:18-19)

 

예수의 나사렛 선언은 진정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은혜의 해, 모든 빚지고 땅을 팔리고 몸을 팔렸던 사람들이 자기 땅을 되찾고 자기 고향으로 돌아가 자기 식구들을 다시 만날 수 있는 해, 그 새로운 출발을 알리는 희망의 선포였고 성취였다.

 

결국 구약과 신약을 꿰뚫는 성경의 경제윤리는 희년의 윤리라고 말할 수 있다. 부자가 사업을 통하여, 권력으로, 법조항의 조작으로 약자의 재산을 점차로 빼앗아가게 되므로 하나님께서 명령하시기를 희년이 되면 원점으로 돌아가서 땅을 잃는 자에게 다시 땅을 주라고 한 것이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윤리적 자아도취를 위해서 십일조를 강조하는 것에 대해서도, 예수는 빚은 전액 무효, 노예 해방, 착취된 재산을 다시 돌려주라는 희년의 명령을 그대로 계승하여 설교하셨다.

 

3) 압바냐, 맘몬이냐? : 나눔의 윤리

한편 성경에서는 경제활동에 있어서 부정의와 불평등을 조장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역행하는 것임을 말한다. 성경의 말씀은 가난한 자와 압박 받는 자들에게로 집중되고 있다.

 

예언자 전통에서 재산은 억압받는 사람들을 올리는 데 사용되어야 하고 배고픈 자를 먹이는 데 사용되어야 하였다. 예언자들이 한결 같이 고아와 과부를 돌보지 아니한 채 경건한 양 예배하는 이스라엘 무리를 꾸짖었다.

 

헛된 제물을 가져오지 말라...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눈을 가리 우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 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니라... 선행을 배우고 공의를 구하며 학대받는 자를 도와주고 고아를 위하며 신원하고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이사야 1:13-17)

 

성경에서 주장하는 바에 따르면 부자가 지옥으로 가는 것은 그의 부요함 때문이 아니라 가난한 자를 위한 자선을 거절했기 때문이다. 부자들의 문제는 소유가 아니라 그것을 적절히 사용하는데 실패했다는 것이다. 예수는 많은 비유를 통해 형제를 몰라보는 부자들의 배타주의와 이기주의를 꾸짖고 계신다.(어리석은 부자의 비유<12:16-21>, 부자와 나사로(16:19-31)) 예수께서는 일꾼은 자기가 일한 몫을 차지할 권리가 있다고 하셨고(마태 10:10, 누가 10:7)야고보서에도 부당한 분배에 대한 경고가 나타나있다.

 

신약시대 경제윤리의 핵심은 초대교회 성령강림을 받은 공동체에서 찾아볼 수 있다. 성령강림 후 예수를 따르던 무리들은 함께 떡을 떼고 각자 재산을 팔아 전도와 공동생활에 내어 놓으니 그곳은 가난한 자가 없었다. 성령을 충만히 받은 다음에 때라 온 경제 윤리적 행동은 자기 재산을 팔았던 것이요, 그곳에는 가난한 자가 없었다는 기적적인 경제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여기서 초대교회 공동체의 자발적 나눔이 공산경제체제의 그것과 틀린 것은 그 자발성에 있다. 그리고 그 자발성은 성령의 강림과 더불어 왔다. 인간 스스로는 온전히 선할 수 없기 때문에 오직 성령의 감화로 변화된 후에야 사심 없는 나눔이 가능하다는 말이다.

 

요컨대 성경에서는 분명한 입장을 나타내고 있다. , 크리스천은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는 것이다. 압바냐? 맘몬이냐? 기독교인이 선택해야 하는 것은 오직 하나다.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관심에 우리도 관심하여야 한다. 신학자 칼 바르트는 그의 저서<교회교의학>에서 이를 잘 지적하였다. 하나님은 항상 무조건적으로 그리고 열정적으로 가난하고 억압받고 혜택 받지 못하는 이들의 편, 오로지 그들의 편만을 드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크리스천이 경제체제를 평가할 때는 그 제도가 가난하고 억압받고 혜택받지 못하는 자들에게 기회와 지지를 제공하느냐를 물어야 한다.  

댓글목록 0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