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 과 일(노동)과 직업

작성자 외마
작성일 17-08-18 11:32 | 조회 24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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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살로니가 후서 3:612 “[6]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명하노니 게으르게 행하고 우리에게서 받은 전통대로 행하지 아니하는 모든 형제에게서 떠나라 [7] 어떻게 우리를 본받아야 할지를 너희가 스스로 아나니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무질서하게 행하지 아니하며 [8] 누구에게서든지 음식을 값없이 먹지 않고 오직 수고하고 애써 주야로 일함은 너희 아무에게도 폐를 끼치지 아니하려 함이니 [9] 우리에게 권리가 없는 것이 아니요 오직 스스로 너희에게 본을 보여 우리를 본받게 하려 함이니라 [10] 우리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도 너희에게 명하기를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 하였더니 [11] 우리가 들은즉 너희 가운데 게으르게 행하여 도무지 일하지 아니하고 일을 만들기만 하는 자들이 있다 하니 [12] 이런 자들에게 우리가 명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권하기를 조용히 일하여 자기 양식을 먹으라 하노라

 

 

노동에 대한 일반적인 정의는 "인간에게 필요한 것들을 얻기 위해 노력하는 일체의 활동"입니다. 노동은 동물계로부터 인간을 구별지어 고양시키기도 합니다. 동물과 인간의 본질적 차이 가운데 근본적인 것은, 동물은 주어진 자연 그대로를 이용하여 살아가지만, 인간은 자연을 노동에 의하여 자신의 목적에 따라서 변화시키고 자신의 필요에 따라 적응시키며 살아갑니다.

 

노동에는 2가지가 있습니다. 육체 노동과 정신 노동이 바로 그것입니다. 몸을 직접 움직여서 일하는 것을 육체 노동이라고 하고, 과학자처럼 주로 머리를 써서 일하는 것을 정신 노동이라고 합니다. 어느 쪽이든 노동을 하는 사람을 노동자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삼성 같은 대기업에 다니는 사람,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수같은 사람은 노동자라고 불리우기를 꺼려합니다. 의사도 마찬가지이죠. 왜 서로 같은 노동력을 기울여서 생산 활동을 하고 소득을 얻는데 교수, 대기업 임원, 의사들은 노동자가 아닌 것이죠? 저는 현실에서 노동의 가치를 중요시 여기지 않는 소위 식자층이라 자칭하는 사람들은 정말 말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모두 다 같은 노동자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리처드 던킨(Richard Donkin)이라는 <파이낸셜 타임스>의 경제 칼럼니스트가 쓴 , , 눈물(바다출판사 2005)에서 저자는 노동의 역사를 자세히 기술하고 있습니다. 흑인노예들의 비참했던 노동상황, 노동의 유토피아를 건설하고자 했던 최초의 사회주의자 로버트 오언(Robert Owen)의 실패, 자본가들의 착취에 대항했던 생생한 노동운동 현장, 경영에 참여하게 하는 현대적 노동통제방식을 읽을 때 저자의 탁월한 통찰력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면 왜 우리는 고통스런 노동을 삶이 이루어 지는 내내 감내해야 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노동 없이는 우리의 삶이 불가능해지기 때문입니다. 일하지 않으면, 경제 이전에 생존의 심각한 위기가 초래됩니다. 노동의 대가인 임금을 받아야 의식주를 해결할 수 있죠. 그러므로 생존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행하는 노동은 고통스럽습니다. 또한 그것은 우리가 원한바가 아니라 우리의 조로 인해 시작되었기 때문에 싫고 짜증나지만 안 하면 안 되는 상황이라서 더욱 고통스럽습니다.

 

성경에는 노동의 시작을 창세기 3장에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17절과 19절을 읽겠습니다. [17]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18]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19]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이 말씀이 인류에게 시사하는 의미는 매우 큽니다. 본능에 사로잡힌 짐승들은 노동하지 않습니다. 노동은 인간의 인간됨을 규정합니다. 노동하지 않는 인간은 본능에 사로잡힌 짐승과 다를 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노동이 끝나는 날 인간은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일을 하지 않아도 될 정도의 부를 쌓아놓고 있다면 어떨까요? 고통스런 노동을 하지 않아도 되니 행복하지 않을까?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노동하지 않으면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맘대로 할 수 있는 정도가 되면 행복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돈이면 무엇이든지 되는 자본주의 세상이니 말입니다. 하지만, 짐승과 달리 인간의 마음과 뇌는 그렇게 작동하지 않습니다. 노동없이 인간의 마음과 뇌는 행복지지 않습니다.

 

비전을 세우고 그것을 달성하기 위해 노동의 수고를 아끼지 않을 때 인간은 행복해집니다. 그것을 외면하는 사람은 그의 영혼이 황폐하게 되어, 살아 있으나 죽은 사람처럼 됩니다. 우리는 주위에서 그런 사람을 자주 봅니다. 그들은 노동 없이 삶을 영위하려는 사람들인데, 대개 뇌물과 불법과 비리에 연루되어 있습니다. 노동의 대가가 아닌 방식으로 부를 축적하여 행복해질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입니다. 주가를 조작하거나 뇌물을 통해 배타적 이권을 얻으려는 사람들입니다. 이를 주류 경제학(이론 경제학)에서는 지대 추구자라고 합니다.

 

노동하는 것 자체가, 그리고 더 좋은 노동을 위한 반복적인 훈련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부여한 저주이자 축복이라고 할 만하며 이는 말씀만이 줄 수 있는 패러독스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불경기와 은퇴와 실업 사이에서 하나님이 허락하신 지혜와 발상의 전환을 통해 노동할 수 있는 잠재력과 힘을 길러야 합니다. 이렇게 함으로 즉, 하나님께서 주신 숭고한 노동의 가치를 깨달음으로 우리 사회는 비로써 건강하고 성숙하고 경제적으로 품위있는 사회와 개인이 될 것입니다.

 

노동 없는 삶은 하나님 존전에서 끊임없이 정결하게 되어야 할 인간이라는 정체성을 잃어버린 삶, 하나님을 알 수 없는 삶이라고 확언할 수 있습니다. 경제적 인간은 노동을 통해 자신의 주체성과 정체성을 확보합니다.

 

리처드 던킨은 그의 책에서 일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쓰고 있습니다.

우리가 일하는 이유는 우리 뒤에 올 사람들에게 우리의 존재에 대한 표지로서, 그리고 우리의 잠재력에 대한 단서로서 좀 더 나은 어떤 것을 남기기 위해서라고. 우리의 일은 인간의 위대함에 대한 본능적인 깨달음의 결과이다.(497)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사람들과 구분되어지는 것 중의 하나는 일과 노동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도록 창조되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직업소명설이라고 합니다. 그 직업소명설이 서구의 여러 나라에 비해 상대적으로 역사가 일천(日淺)한 미국이라는 신생국가를 단기간 내에 경제와 문화에서 세계를 선도하는 선진국으로 만든 토대가 되었음을 부정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일하시는 하나님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일(노동)은 원래 선하고 거룩하고 즐겁고 아름다운 것이었습니다. (노동)은 하나님의 창조로부터 나오며 창조와 함께 시작합니다. 하나님은 일(노동)하시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실 때도 일하셨고 지금도 세상을 통치하시며 일하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5:17)"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천지와 인간을 창조하신 후에 인간에게 창조 세계를 맡기면서 일(노동)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세계에 대한 인간의 다스림은 일(노동)을 통해 수행됩니다. 인간은 일(노동)하시는 거룩한 하나님을 따라 마땅히 거룩한 일(노동)을 해야 합니다. 원래 인간은 하나님을 대리하여 일하는 하나님의 대리자이자 창조 세계를 맡아서 관리하고 다스리는 청지기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노동)하시는 하나님처럼 인간도 일(노동)하도록 지음 받은 존재입니다. 따라서 인간에게는 일(노동)해야 할 책임과 의무 그리고 권리가 있습니다. 인간은 일(노동)을 통해 하나님의 모습과 영광을 드러내야 합니다. 인간이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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