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원리(經濟原理)에 대한 기독교 철학적 논의(2)

작성자 외마
작성일 17-09-02 17:23 | 조회 4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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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책임(responsibility)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여라. 땅을 정복하여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 위에서 살아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려라”(창세기 1:28)

 

크리스천에게 이 문화위임명령은 사유재산권을 허용하는 근거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세계에 대한 책임의 원리를 제공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땅을 정복하고 생물을 지배하는 권리인 통치권(dominion)을 주신 것이다. 시편 8편은 이 사상을 더욱 분명히 보여준다.

 

주께서는 사람을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지으시고 그에게 영광과 존귀의 왕관을 씌워 주셨습니다. 주께서 손수 지으신 만물을 사람이 다스리게 하시고, 모든 것을 사람의 발아래 두셨습니다. 크고 작은 온갖 집짐승과 들짐승까지도, 하늘에서 나는 새들과 바다에서 노니는 물고기와 물길 따라 움직이는 모든 것을, 사람이 다스리게 하셨습니다.”(시편 8:5-9)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이 세계와 생물을 다스릴 수 있는 전권을 위임 받았다. 문제는 이 권한은 역사에서 보아왔던 정복’(conquest)의 의미가 아니라는 점이다. 이 지배권은 오히려 이름부여를 통한 관계형성’(2:19), ‘평화로운 질서와 균형의 유지’, ‘약자에 대한 돌봄등으로 보아야 한다. 그러나 서양의 역사에서 기독교는 세계에 대한 지배권에서 자연에 대한 책임의 측면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그 부작용은 1492년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후, 원주민을 동원한 정복자들의 금과 은의 무분별하고 탐욕스러운 채굴을 통해서 나타나기 시작해서 1812년 영국에서 뉴커먼에 의해 증기기관이 발명되면서 가속화된 산업혁명에 의해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 두 사건 모두 기독교 국가를 자처했던 스페인과 영국에 의해 주도되었다. 서구 기독교와 무분별한 자연의 착취의 결합에 대해 1967년 레슬리 화이트가 사이언스(Science)지에 발표한 논문 우리의 환경 위기의 역사적 뿌리”(the historical roots of our ecological crisis)는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이 논문에서 화이트는 자연은 인간에게 봉사하는 것 이외에 다른 존재이유가 없다는 기독교의 공리를 거부하기 전에는 환경 위기는 계속 악화될 것이다. . . 우리가 가지고 있는 현재의 과학과 기술은 정통적인 크리스천과 너무 동화되어서 환경위기에 대한 어떤 해결책도 그들로부터는 기대될 수 없다.”는 날카로운 비판을 제기했다. 사실 화이트의 비판은 신학적이라기보다는 역사적인 성격이었지만 20세기의 크리스천들이 문화위임명령을 자연에 대한 책임을 동반하는 지배권으로 바르게 이해하는데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크리스천은 인간자연에 대한 하나님의 위임을 일방적인 정복이나 착취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이런 점에서 최근에 제시된 지속가능한 사회”(sustainable society)에 대한 논의는 자연에 대한 책임 있는 관리자의 소명을 받은 모든 크리스천도 참여해야할 영역이다. 미국의 정치학자 밀브래스는 같은 제목의 책에서 인류의 위기는 지배하는 방법에 대해 너무나도 잘 학습해온 결과인 종으로서의 우리 인류의 성공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진단한다. 그러나 이 성공은 지구의 자원을 인간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 사용할 수 있게해주었지만 인구폭발생물권의 파괴기후변화를 낳았고 인류의 미래를 위협하고 있다. 밀브래스는 이 위협에 대한 대안으로 (특히 저개발 국가의) 인구 억제, 에너지 사용의 제한, 환경친화적인 기술의 개발과 보급, 대도시의 인구집중의 억제. 군사비를 환경보호비용으로 전환 등을 들고 있다. 크리스천은 종말론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지만, 자연에 대한 이러한 책임에 대해 무관심한다면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관리자로서의 책임을 회피하는 것이 된다.

 

책임의 문제는 물론 이렇게 거시적인 환경문제에만 국한되지는 않는다. 기독교윤리학자 윌리엄 슈바이커는 기독교 책임윤리를 크리스천의 모든 행위와 관계에서 하나님 앞에서의 삶의 통전성을 존중하고 함양하는 것으로 정의한다. 이 정의에서 삶의 통전성(integrity)이란 삶의 모든 영역과 부분이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직시하고 그 모든 영역에 대한 개인적, 사회적, 국가적 차원의 책임을 의식하고 실천한다는 의미이다. 크리스천은 자신에게 개인적으로나 집단적으로 맡겨진 재화에 대해 책임있는 경제행위를 하도록 부름 받았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새 하늘과 새 땅이 올 때까지 이 책임을 다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 것이다.

 

(3) 자유(freedom)

 

앞서 말한 사유재산권과 책임은 개인의 자유와 뗄 수 없는 원리이다.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 사유재산권은 자유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반대로 개인의 자유는 사유재산을 갖거나 사회적 책임을 갖는데 필수적인 조건이라고 할 수 있다. 자유가 없는 사람에게 책임있는 행위를 하기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그렇다면 자유는 어디서 오는가? 과연 인간은 자유로운가?

 

이런 물음에 대답하기 위해 우선 성경에서 출발해 보자. 성경은 자유가 인간에게 주어진 창조의 선물이라고 본다. 이 자유는 이미 세계의 모든 생물에 대한 관리권과 음식권이 주어진 창세기 1장의 문화위임명령에서도 암묵적으로 나타났지만, 창세기 2장에서 더욱 명시적으로 주어진다.

 

주 하나님이 사람에게 명하셨다. ‘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의 열매는, 네가 먹고 싶은 대로 먹어라. 그러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만은 먹어서는 안 된다.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는 반드시 죽을 것이다’.”(창세기 2:16-17)

 

하나님은 최초의 인간에게 자유로운 선택의 권리를 허락했다. 인간은 하나님의 명령을 준수할 수 도 있고 거부할 수 도 있는 권리, 즉 자유를 허락받은 것이다. 그러나 자유의 열매는 썼다. 인간은 뱀(사탄)의 유혹 아래 하나님의 명령을 준수하지 않고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먹었다. 그 결과 고통과 죽음이 인간에게 찾아왔다.(3:1-20) (sin)의 기원에 대한 창세기의 말씀은 인간의 자유의 이중성을 알려준다. 인간은 자유롭게 창조되었다. 그 점에서 자유는 인간의 본질적 속성이다. 인간은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선택하고 결정해서 행위 할 수 있다. 동시에 이 가능성은 역사적인 현실 속에서 항상 왜곡되어 나나난다. 최초의 인간부터 이 자유를 잘 못 사용했기 때문이다. 자유의 오용과 남용은 인간의 또 다른 본질이 되었다. 만일 인간에게 자유가 본래 없다면, 인간은 자유를 추구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역사적으로 끊임없이 자유를 추구해 왔고 실현시켜 왔다. 고대에 당연시 되었던 노예제도와 중세의 봉건제도를 무너뜨리고 18세기 후반의 정치혁명을 통해 모든 사람이 자유롭고 평등하다는 이념을 사회제도로 실현하기에 이르렀다. 이 사건이 우리가 잘 아는 1789년의 프랑스 혁명이다. 150여년이 지나서 20세기 중반에야 모든 여성과 남성이 참정권을 얻었고 거의 모든 국가들이 자율적인 통치권을 얻었다. 이러하게 볼 때, 인류의 역사는 자유의 확대와 실현의 역사이다. 기독교는 로마제국의 노예제 사회를 정치혁명을 통해 바꾸려고 하지는 않았지만, 자유인이나 노예, 귀족이나 평민 모두가 하나님의 자녀이고 형제자매라는 신앙을 통해 근대의 자유주의를 준비시켰다. 특히 모든 인간이 신앙을 통해 하나님과의 계약(언약) 관계에 들어오고 신앙공동체인 교회 안에서 이 계약이 유지된다는 신학은 17세기 이후의 사회계약이론의 토대를 제공했다.

 

자유를 인간사회의 가장 중요한 가치로 보는 자유주의(liberalism)는 바로 이 사회계약이론이 발전된 형태이다. 주로 영국과 프랑스에서 발전된 자유주의는 로크, , 벤담, , 루소, 몽테스키외, 칸트 등의 사상가들에 의해 발전되고 숙성되었다. 역사적으로 자유주의에는 고전적 자유주의, 사회적 자유주의, 질서자유주의, 신자유주의 등의 여러 종류가 있지만, 적어도 다음의 공통적인 신념을 가지고 있다. 첫째, 개인의 자유는 보장되어야 한다. 둘째, 인간은 사회적으로 평등하다. 셋째, 개인의 모든 행위는 자기에게 귀속된다. 넷째, 개인들의 신념이나 상호간의 비판은 관용되어야 한다. 자유주의는 이러한 신념을 사회적으로 실현하기 위해 민주주의, 경쟁적 시장경제, 법치주의라는 세 가지 수단을 상호보완적으로 사용해 왔다. 특히 1989년 동구권 사회주의 체제의 몰락 이후 지구상의 거의 대부분의 국가가 자유주의를 정치이념으로 받아들였다. 우리가 살고 있는 대한민국도 자유주의의 근거한 민주공화국이며 대부분의 한국 크리스천도 자유민주주의 체제에 순응하고 있다.

 

그렇다면 자유주의에 대한 크리스천의 평가는 항상 긍정적이어야 하는가? 이미 앞서 보았듯이 성경은 인간의 자유에 대해 이중적인 평가를 하고 있다. 인간에게는 다른 사람의 구속에서 벗어나 독립적으로 생각하고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주어졌지만, 인간은 원죄 때문에 항상 이 자유를 잘못 사용하게 된다는 역설이다. 고전적 자유주의 경제학의 창시자라고 할 수 있는 아담 스미스는 국부론(The Wealth of Nations)에서 법의 준수를 통해 이기심을 억제하면서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자기애(self-love)를 자유주의 경제의 기본원리로 삼았다. 그러나 실제 자유주의의 역사를 보더라도 이기심의 억제 또는 법의 준수와 자기에의 추구 사이에는 항상 커다란 괴리가 놓여있었다고 할 수 밖에는 없다. 크리스천은 바로 이 괴리의 원인을 모든 인간을 점령하고 있는 죄라고 부른다. 결국 기독교의 시각에서 볼 때, 자유주의의 문제는 원죄에 의해 발생하는 인간의 이기심과 탐욕에서 나온다고 할 수 있다. 시립대학의 경제학자 이근식도 자유주의에 대한 반감이 자본주의 체제에서의 빈부격차와 불황, 실업, 독점, 환경파괴를 야기하는 시장의 실패에 기인하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자유는 소중하지만, 자유의 결과는 인간에게 항상 행복을 선사하지는 않는다. 여기에 자유는 필자가 다음 장에서 살펴 볼 정의, 평등, 사랑의 요구와 만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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