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원리(經濟原理)에 대한 기독교 철학적 논의(1)

작성자 외마
작성일 17-09-02 17:22 | 조회 4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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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경제원리와 기독교철학

 

경제학자와 경영학자 앞에서 한 철학자, 더구나 사회철학을 전공으로 하지도 않는 철학자가 경제의 원리에 대해 설명하는 것은 난생 처음으로 돈이 중요하는 생각을 하게 된 유치원생이 은행원들 앞에서 돈의 중요성을 역설하는 모습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러나 경제에 대해 논리적으로 이야기를 전개하려면 경제라는 개념에서부터 출발하지 않을 수 없다. 과연 경제를 기독교철학적으로 논의한 다는 것을 어떻게 하는 것일까? 이 물음에는 다양한 대답이 가능하다. 기독교철학도 하나의 방식만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필자가 생각하는 기독교철학은 성경의 사상과 원리를 일반 철학이나 학문이론과 대화하고 대결시킴으로써 현대인들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와 논리로 설명하고 설득하는 활동이다. 따라서 필자는 이 글에서 경제의 원리를 성경에 근거해서 찾아내어 최근의 사회철학과 경제학 연구와 접목시켜 논의를 전개하고자 한다.

 

일반적으로 경제는 재화와 용역을 생산, 분배, 소비하는 활동 및 그와 관련되는 질서와 행위의 총체로 정의된다. 이 정의는 경제현상을 가장 포괄적으로 규정하는 방식일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경제원리를 철학적으로 생각해보려고 한다면 재화와 용역을 생산하거나 소비하거나 분배하는 행위의 이유 내지 목적을 묻지 않을 수 없다. 우리 인간은 왜 경제행위를 하는 것일까? 당연히 나올 수 있는 대답은 생존’(existence)의 이유일 것이다. 인간은 살기 위해 태어났다. 살려고 하는 본능적 욕구를 채우기 위해서는 숨쉬는 공기 이외에 의, , 주의 조건이 필요하다. 인간은 이러한 조건을 기본적으로 자연’(nature)으로부터 얻는다. 인간의 생존에 필요한 자연이란 경제학의 개념으로 말해서 공기, , 토지, 지하자원, 동식물 등이다. 경제행위는 이미 주어져 있는 이러한 자연을 이용하거나 가공해서, 즉 노동(labor)을 통해서 재화(commodities)를 만드는 행위이다. 인간의 역사는 사회 안에서 재화를 만들어 온 역사이며 재화를 이용하여 생존해 온 역사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이 경제활동을 하는 이유는 우선 지구상에 살아남기 위해서이고 그 다음으로는 ’(well) 생존하기 위해서 이다. 잘 산다는 것은 우선 요즘 한국 사회에 유행하는 물질적이고 신체적인 의미의 웰빙’(well-being)의 의미일 것이다. 더 나아가 문화적이고 정신적으로 잘 사는 것도 경제행위의 목적에 들어 갈 것이다. 사회에 속한 많은 사람이 넓은 의미로 잘 사는 것, 여기까지가 일반 경제학이 전제하고 있는 경제의 목적일 것이다.

 

그러나 자연의 창조자인 하나님을 믿는 크리스천의 경우, 다른 사람과 함께 지구상에 살아가지만, 경제의 원리에 대한 생각은 조금 다를 것이다. 무엇보다도 크리스천은 자연을 아무 소유주 없이 방치된 대상으로 생각할 수 없다. 자연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으므로 자연의 본래 소유자는 하나님임에 틀림없다. 구약성경의 시편 241절과 2절은 이 생각이 가장 직접적으로 표현된 구절이다.

 

땅과 그 안에 가득 찬 것이 모두 다 주님의 것, 온 누리와 거기에 살고 있는 그 모든 것도 주의 것이다. 분명히 주께서 그 기초를 바다 밑에 놓으셨고, 강바닥에 단단히 세우셨구나.”

 

따라서 인간은 원소유자인 하나님의 허락 아래 재화를 관리하고 이용할 뿐이다. 이 말은 크리스천은 자신이 비록 재화를 사회적으로 획득했을지라도 그 재화를 배타적이고 독점적인 소유물로 여기지 않음을 의미한다. 또한 크리스천은 그 재화의 원소유권을 인정하고 원소유자의 의도와 목적에 따라 재화를 이용한다는 뜻으로 이해될 수 있다. 여기서 하나님의 원소유권을 인정하는 경제행위가 무엇인지 보다 구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음 두 가지 질문에 답해야 한다. 하나는 크리스천은 자기가 가진 재화의 이중 소유권, 즉 하나님의 원소유권과 자신의 사회적인 소유권의 관계를 어떻게 이해’(understand)해야 하는가의 질문이다. 또 하나는 이러한 이중 소유권의 대상인 재화를 어떻게 사용’(use)해야 하는가의 질문이다.

 

필자는 첫째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사유재산권’(proprietary rights)책임’ (responsibility)자유’(freedom)라는 경제원리를 고려해야 하고 둘째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정의’(justice)평등’(equality)사랑’(charity)의 원리를 탐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결국 크리스천이 현실 사회에서 재화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과 소유권을 인정한다는 것은 일반 정치경제사에서 중심원리로 다루어졌던 소유, 책임, 자유, 정의, 평등, 사랑의 원리를 성경의 관점에서 다시 해석하고 그에 따라 실천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2. 하나님의 소유권과 인간의 소유권

 

(1) 사유재산권(proprietary rights)

 

하나님이 창조주라는 믿음이 기독교 신앙의 초석이자, 마지막 보루라면 이 세계의 모든 재화의 소유권이 하나님께 귀속되는 것은 크리스천에게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다만 조금 더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하나님이 어떻게 당신의 소유권을 인간에게 양도하거나 임대해 주셨는가의 문제이다. 대부분의 인류역사와 사회에서 인간은 실제로 재화의 소유권을 주장해 왔고 또 인정받아 왔기 때문이다. 인간은 무슨 권리로 하나님의 소유권을 자신의 것으로 주장하게 되었을까? 개혁신학(reformed theology)에서 문화위임명령’(cultural mandate)이라고 부르는 창세기 1:27-29로 돌아가 보자.

 

하나님이 당신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으니,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다. 하나님이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베푸셨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여라. 땅을 정복하여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 위에서 살아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려라하셨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온 땅 위에 있는 씨 맺는 채소와 씨 있는 열매를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준다. 이것들이 너희의 먹을거리가 될 것이다.”

이 구절은 적어도 크리스천에게 하나님의 목적과 의도에 관해 적어도 네 가지를 가르쳐 준다. 첫째는 하나님은 인간을 하나님과 유사하도록 창조하셨다는 것과 둘째, 남녀 인간을 창조하셔서 생존할 뿐만 아니라, 자손대대로 번성하도록 의도하셨다는 점이고, 셋째는 인간에게 모든 생물에 대한 관리(지배) 권한을 위임하셨다는 점이며, 넷째로는 모든 식물을 음식으로 주셨다는 것이다. 따라서 크리스천이 이 세계의 재화의 진정한 주인이 아니라, 단지 대리인이나 청지기(steward)라고 하여도 실제로 그 권한은 막강하다고 할 수 있다. 인간은 세계에 대한 소유권을 가진 하나님에 버금가는 지위를 가지고 있고 번성하도록 복을 받았으며 생물에 대한 실질적인 지배권을 가졌고 모든 식물, 나중에는 동물까지도 음식으로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성경에 근거해서 볼 때, 재화에 대한 인간의 소유권 주장은 사실 이 위임명령으로부터 왔다고 보아야 한다. 이 명령은 유대인이나 크리스천뿐만 아니라, 아담과 하와의 후손인 모든 인간에게 주어졌기 때문이다. 개혁주의에서는 이 위임명령에 나타난 하나님의 축복과 명령이 인간과 세계의 총체적 타락(fall)에서 불구하고 여전히 모든 인간에게 남아 있다고 믿는다. 따라서 이 명령은 재화에 대한 사유재산권’(proprietary rights)의 기초를 제공한다고 볼 수 있다. 다만 사회적으로 인정된 사유재산권은 배타적이고 독점적인 성격이 아니라, 하나님의 원소유권을 인정하는 전제 위에서 성립하는 대리인(청지기)적 소유권이다.

 

실제로 성경에서 사회적인 차원의 사유재산권을 부정하는 경우를 찾아보기 어렵다. 구약 성경에서 사유재산권을 인정하는 수많은 사례 중에서 대표적인 예로는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주어진 소유권과 상속권의 예이다. 하나님은 창세기 15장에서 아직 자기 땅 한 평 없는 이주민에 불과한 아브라함에게 가나안 땅의 소유권을 약속한다.(7) 또한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이삭에게 아브라함의 재산에 대한 상속권을 부여한다.(4) 이 약속의 연장선에서 여호수아 13:7-8 에는 레위지파를 제외한 모든 이스라엘 지파가 요단강 동쪽과 서쪽의 땅을 소유지로 분배받는 사건이 나오며 욥기의 마지막인 42:12에는 고난을 통과한 욥이 처음보다 더 큰 재산을 소유하게 되는 사건이 기록되어 있다.

 

신약성경에는 재화의 위험성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이 처음부터 동반되지만 사유재산권 자체가 부정되지는 않으며 사유재산에 기초한 이윤추구가 긍정적으로 묘사되기까지 한다. 마태복음 6장에는 하나님과 맘몬’(우상화된 재화)을 함께 주인으로 섬길 수 없다는 예수의 경고가 주어지지만, 25장에는 유명한 달란트 비유가 등장한다. 이 비유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주인의 재산을 적극적으로 경영해서 이윤을 남긴 관리인()들을 칭찬하는 반면에 무능한 관리인을 질책하고 있다. 비슷한 성격의 비유인 누가복음 19장의 열 므나의 비유에서도 장차 왕이 될 귀족의 은화를 맡은 종들이 적극적인 사업을 통해 이윤을 창출했을 때, 성읍을 다스리는 권한이 보상으로 주어지기까지 한다. 초기의 서신인 데살로니가 후서에서 사도바울은 일하기를 싫어하는 사람은 먹지도 말라”(3:10)는 명령으로써 무절제하고 게으른 신자들을 엄하게 책망하고 스스로 일해서 자립할 것을 가르치고 있다.

 

성경에서 사유재산제가 인정된다 하더라도 크리스천이 오늘날 자본주의의 사유재산권을 정의로운 것으로 옹호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좀더 신중하게 생각해 보아야 한다. 자유주의 논객 복거일은 자본주의가 정의롭다고 주장하면서 그 근거를 일상적 자연스러움에서 찾는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사유재산권이 역사적으로 오랜 역사를 지녔고 자연스럽다고 해서 항상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 각종 투기행위에서 보이는 것처럼 자본주의 내에서 막대한 사유재산이 상대적으로 현저하게 작은 노력으로 손쉽게 얻어지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호주의 사회학자 브라이언 터너는 자본주의가 원초적 시민권 관념을 촉진하고 발전시키지만, 자본주의는 또한 주로 경제적 성격의 대규모 불평등을 창출한다고 말한다. 캐나다 리전트 대학의 기독교경제학자 크레익 게이도 시장 자본주의는 결코 이상적‘(ideal) 경제 시스템으로 경험되지도 않았고 어떤 종류의 고전적인 철학이나 목적론의 의미에서 잘 살거나’(live well) ‘선 자체’(goodness per se)를 욕구하도록 참여자에게 요구하지도 않았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money) 역시 현대 자본주의가 안고 있는 당황스러운 문화적 모순들에 직?간접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말한다. 따라서 기독교 신앙의 입장에서 사유재산제의 정당성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 재화에 대한 하나님의 소유권이 얼마나 인정되는가에 따라 주어진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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