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빈론(淸貧論)과 청부론(淸富論) -3

작성자 외마
작성일 17-09-02 07:56 | 조회 55 | 댓글 0

본문

 

3) 마태복음6:24;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함의 의미

 

예수님께서는 상상보훈 가운데서,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고 분명히 말씀하셨다. 우리 주변에는 이 말씀의 진정한 의미를 오해하는 이들이 많이 있다. 그들은 재물을 섬긴다는 말이 물질적 탐심을 지칭하고 있다고 한다. 여기서 재물이란 좁은 의미에서는 돈을 의미하지만 이 세상을 지칭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말씀에서 교훈하고자 하는 것은 세상에서 가질 수 있는 탐심에 대한 경고성 의미를 가진다는 것이다. 이 말씀이 물질을 지나치게 탐하는 것에 대한 경고의 말씀일까? 돈을 탐하고 재산을 축적하려는 사람들에 대한 경고라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한편 이 말씀을 보며 이방인 처럼 돈을 섬겨서는 안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 가운데 자신은 돈을 섬긴다고 생각하는 자들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돈을 섬긴다고 하면 이방종교를 믿는 불신자들이 돈을 앞에 두고 절을 한다든지 하는 것을 염두에 두고 있을까? 우리 한국의 경우 고사를 지낼 때 돈에게 절을 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예를들어 고사를 지내거나 산신제를 지낼 때 삶은 돼지머리의 입에 돈을 꽂아두고 절을 하는 것은 일반적인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 본문에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물질을 섬김에 대한 진정한 의미는 무엇일까? 우리 가운데 아무도 자기는 돈을 섬긴다고 생각하는 자가 없을 것이다. 교회에 출석하는 사람들 중에 돈에 절을 하거나 돈을 숭배하는 사람들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돈에 대한 궁극적인 탐심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들이 많이 있을 것이다. 그들도 자기는 돈을 섬기지는 않는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특히 현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이미 돈을 섬기고 있는지 모른다. 이런 반성적 생각을 할 수 있을 때 비로소 그 의미가 분명히 드러날 것이다.

 

이 본문에서는 하나님과 재물은 공존할 수 없는 것으로 분명하게 묘사되고 있다. 즉 서로 조화될 수 없는 반대편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만을 섬겨야 한다. 하나님 이외의 것을 의지하고 그 위력을 인정하는 것은 이방인들의 행위이다. 따라서 돈을 섬긴다는 것은 돈의 위력을 인정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돈의 위력을 인정하고, 돈이 있으면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곧 돈에 굴복하는 것과 같다.

 

4. 성경에서 교훈하는 물질관과 성도의 자세

 

물질적 부에 대하여 구약과 신약은 서로 상반된 교훈을 하고 있는가? 앞의 시편 112편과 마태복음 19:21-26; 6:24을 보면 그 의미를 잘 알지 못할 경우 서로 상반되는 교훈을 하고 있는 것처럼 들리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언약사상을 알고 있다면 그 양자가 통일성 있는 조화되는 교훈을 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구약의 시편 112편은 그 중심에 예수그리스도가 있으며 그가 곧 부의 상징인 것이다. 구약성경의 핵심개념은 땅과 백성이다. 하나님께서 조상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것이 곧 그 땅과 백성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땅에 살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백성에게 풍요로운 축복이 약속되며 그것은 메시아의 오심을 통해 드러나게 된다. 따라서 신약성경에 나타난 부에 대한 개념은 그리스도 자신이 부요의 내용이며, 그 이외의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다. 아무런 의미없는 것에 집착하거나 그에 의지하는 것은 곧 우상숭배적 현상이며 하나님을 멀리 하는 것이 될 수 밖에 없다.

 

성도들에게 있어서 빈부 자체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성도에게 있어서 이 세상에서 부자냐 아니냐 하는 것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물론 부의 유무로 인해 좀 편리한 삶을 살수도 있을 것이며 좀 더 불편한 삶을 살게 되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 자체가 의미있는 것은 아니다. 교훈적인 측면에서 볼 때 성경에서 말하는 부자란 물질적 부자에 국한되지 않는다. 건강, 학벌, 능력, 외모, 직업, 재능, 명예 등 모두가 동일한 관점에서 설명될 수 있다. 우리는 이 세상을 누리며 살만한 조건들을 잘 갖추고 있는 것을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배워오고 있다. 중요한 것은 주님의 자녀답게 근면하고 성실하게 살아가는 삶의 자세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주어진 각기 다른 환경과 여건 속에서 성실하게 일해야 하며 그 결과 얻은 물질을 잘 저축하며 지상에서의 삶의 성도로서의 온전한 삶을 살수 있도록 계획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부자에 대한 기준을 정하기가 애매한 것을 잘 알고 있다. 어떤 사람이 부자인가 하는 점을 이야기 할 때 우리는 그 기준을 잡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일 천만원을 가지고 있으면서 부자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일 억원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가난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세상을 누리고 살만한 많은 조건들을 갖추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더 많은 것을 얻으려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 사람들은 아직도 자기의 삶에 만족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이 세상에서 더 많은 것을 얻어 누리려고 하는 것은 욕심에 기인한다.

 

또한 미국이나 유럽 등 선진국에 사는 사람들은 양심의 거리낌이 없이 부유하게 살 권리가 있고 가난한 나라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그렇게 할 권리가 없는 것인가 하는 점도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이다. 이것은 부나 가난에 대해 객관적 기준을 제시할 수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이 말은 곧 절대 다수의 많은 사람들이 나름대로 상대적 부자이기도 할 것이며 동시에 많은 사람들이 상대적으로 가난한 사람일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가난의 일반적 기준은 먹고 살만한 음식이 부족하고 질병에 걸려도 병원에 갈만한 형편이 되지 못하며 몸을 편안하게 눕혀 살만한 집이 없는 사람들이 정말 가난한 사람들일 것이다. 그런 관점이라면 적어도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가난해 질 수 없다. 만일 어떤 사람이 그런 삶을 의도적으로 고집한다면 그것은 비신앙적 고행주의자일 따름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느 선까지가 부자이며 어느 선까지가 가난한 자인가 하는 점에 대해 객관적 잣대를 제시할 수 없다. 그러므로 현재 한국 땅에 살아가고 있는 성도들은 특별한 경우들을 제외한다면 웬만하면 다 부유한 자 일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다.

 

성도의 삶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가 하는 점은 명확하다. 성도는 이 세상에서 부자일 수도 있고 가난할 수도 있다. 물질적으로 부유하거나 가난할 수 있으며 다른 능력이나 무형적인 면에서 부유하거나 가난할 수도 있다. 사도바울은 성도의 삶이 가난에 처할 줄도 알고 부에 처할 줄도 아는 자신의 삶을 표준으로 제시하고 있다(4:11,12). 그러나 부자가 되는 것이 중요하냐, 아니면 가난하게 사는 것이 미덕이냐 하는 것 자체로서는 성도의 삶에 있어서 별 관계가 없다. 성도가 주어진 환경 가운데서 어떤 자세로 살아가야 하는가 하는 점이 중요할 따름이다. 성도가 부유하게 사는 것은 결코 자랑거리가 될 수 없다. 그것을 두고 하나님의 은혜니 축복이니 하는 것은 신앙적 미성숙의 표현일 따름이다. 히브리서 11장에 나타난 신앙의 선진들 보다 더 크고 많은 축복을 누리며 살고 있다고 할 수 있는가? 성도가 부자일 때는 그렇지 못한 다른 이웃에 대해 자랑이 아니라 도리어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 만일 부유한 삶이 하나님의 축복이라 여긴다면 자랑거리가 되어 미숙한 삶을 살 수 밖에 없을 것이다.

 

 

5. 결론

 

예수님께서 과부, 억눌린 자, 장애자 등과 가까이 하시게 된 것은 그들에게는 세상에 기대할 만한 소망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 땅에 살아가는 성도가 천국에만 소망을 두고 살아가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그러므로 이 땅에 다른 소망을 이룩해 갈만한 다른 요소들을 축적하여 부자가 되려고 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결국 천국의 소망과 이 땅에서의 소망을 혼돈함으로써 세상을 탐닉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부는 결국 천국에 들어가는 소망을 없애버리거나 약화시킬 것이다.

 

사도바울은 디모데에게 편지하면서, 돈은 일만 악의 뿌리라고 말하고 있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 자기를 찔렀도다”(딤전 6:10). 디모데후서3:1,2에서도,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면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라고 말하고 있다.

 

돈을 사랑하는 자들은 돈의 위력을 알고 그 위력을 인정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능력은 상징적 능력이며 돈의 위력은 실제적인 능력이라 믿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개인 뿐 아니라 집단도 마찬가지이다. 타락한 교회는 그와 동일한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돈의 위력을 실제적인 능력으로 인정하여 하나님의 능력을 관념화 시키는 것은 죄악이다. 그것은 사람을 눈멀게 하며 망하게 한다. 부자와 천국은 서로 반대편에 서 있다. 부자는 세상을 즐거워하고 누리는 동안 천국을 소망하지 못할 것이다. 이 세상이 충분한 즐거움을 제공하는 터에 굳이 천국의 즐거움을 바랄 이유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가운데 놓여 있는 것이 곧 돈이다. 돈을 가지고 있으면 많은 공부도 할 수 있고, 큰 사업을 벌일 수도 있다. 돈을 통해 즐거움과 안락함을 누릴 수 있을 것이며 자녀를 소위 훌륭하게 키울 수도 있다. 입으로는 하나님의 능력을 이야기 하지만 결국 돈이 해결사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글을 읽는 대다수는 이미 부자들이다. 우리시대는 전반적으로 부요한 시대가 되어 있다. 그래서 성도들이 올바른 신앙을 유지하며 살기가 쉽지 않은 시대가 되어 있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고등교육을 받았을 것이며 다수는 남들이 보기에 부러움을 살만한 좋은 직장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대개는 좋은 건강을 유지하고 있을 것이며 건실한 생활을 함으로써 가정생활도 무난할 것이다. 경제적인 궁핍도 별로 느끼지 않는 사람들이 대다수일 것이다. 교회나 사회에서도 어느 정도 필요한 사람으로 인정받아 제 역할을 하며 살고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미 부자가 되어 있다.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

 

우리 중 다수는 이미 부유한 상태로 살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그 부가 아무것도 아님을 신앙적으로 깨달아야 한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을 지금 당장 다 빼앗긴다해도 별 아까움 없이 덤덤하게 받아들일 수 있어야만 한다. 이 세상에서 소유하고 살아가는 모든 것들은 다 배설물과 같은 것들이기 때문이다. 내가 가진 그 모든 것들이 일시에 무너지고 상실되면 삶의 의미가 없어지는 듯하고 인생을 실패한 것 처럼 느껴진다면 아직 어린 신앙인이거나 천국밖에 서성이는 부자라 할 수 밖에 없다.

 

그러면 가난한 사람들은 그 가난함이 천국을 보장하는가? 물론 아니다. 물질적으로 가난할 뿐 아니라 배우지 못하고 능력이 없고 건강이 약한 사람들도 많이 있을 수 있다. 천국은 과연 그렇게 사는 사람들의 것인가? 만일 그런 사람들이 다른 부유한 사람들을 부러워하거나 그런 부자가 되기를 바라고 살아간다면 그들 역시 부자에 속한다. 세상에서 기댈 언덕을 끊임없이 추구해감으로써 천국의 의미를 알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현재의 형편에 관계없이 가난한 자로 살아가야만 한다. 남들이 눈에 비쳐지는 바나 스스로의 생각에 따른 부와 가난에 관계없이 진정으로 가난하게 사는 의미를 깨달으며 살아가야 한다. 지금 논의되고 있는 청부론은 자칫 부자들을 잘못된 신()기복주의적 축복론과 함께 스스로 합리화할 수 있는 빌미를 제공할 위험이 있으며 따라서 교회내의 가난한 자들을 부끄럽게 할 것이다. 지금의 청부론이 일부 부유한 사람들에게 명분을 주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 동시에 청빈론이 일부 가난한 사람들에게 부유한 사람들을 냉소하거나 비난할 수 있는 빌미로 이용되어서도 안된다. 부자들은 자기의 형편에 따라 청부론을 지지하고 가난한 자들은 자신의 모습을 보며 청빈론을 지지한다면 큰 문제다.

 

참 부자는 하나님의 은혜만으로 풍성함을 누리는 자들이다. 그들에게는 이 세상에서 더 이상 잃어버릴 것이 없다. 설령 자기가 소유한 모든 것들을 일시에 상실 당한다 해도 여전히 주님의 풍요를 누릴 수 있는 자들이 진정한 부자들인 것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성도의 물질관은 결국 부자가 되어야 하느냐, 아니면 가난하게 살아야 하느냐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성도의 가치관의 문제이다. 즉 부유하면서도 그것이 진정으로 아무 것도 아님을 알며 살아가는 성숙한 성도들이 있을 수 있을 것이며 가난하면서도 물질에 가치를 둠으로써 천국문을 통과하지 못하는 자들이 있을 수 있다. 그리고 자기의 수입을 잘 분배하고 나누는 것이 성도로서 마땅히 해야할 행위로 여기고 그것을 마치 자신의 의인 것처럼 생각하는 자가 있다면 그는 바늘귀를 통과할 수 없는 낙타처럼 천국문을 들어갈 수 없는 부자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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