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빈론(淸貧論)과 청부론(淸富論) -2

작성자 외마
작성일 17-09-02 07:55 | 조회 42 | 댓글 0

본문

3. 성경 본문을 통한 물질관을 살핌

 

우리가 성경적인 물질관을 논할 때는 전체적인 이해를 해야한다. 만일 어떤 사람들이 부분적인 문구를 인용하며 성경적 정당성을 이야기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곤란하다.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물질적 축복을 하신다는 내용이 나오는가 하면 그와는 반대되는 말씀도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필자는 구약에 기록된 성도의 물질적 축복에 대한 약속과 신약성경의 물질에 대한 경고의 말씀을 동시에 살펴봄으로써 성경적인 물질관을 정리해 보고자 한다.

 

1) 시편112; 물질에 관한 해석과 메시아 사상

 

구약성경에는 물질적 축복을 언급하는 내용들이 많이 있다. 여러 내용 중 두드러지는 한 본문이 시편 112편이다. 거기에는 분명히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허락하실 물질적 축복을 언약으로 말씀하고 계신다. 그러나 우리는 구약성경의 말씀을 언약적 관점에서 해석해야할 필요가 있다. 즉 하나님께서는 본문을 통해 단순한 물질적 축복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메시아로 인해 얻게되는 영원한 축복을 교훈하고 계신다. 예수님과 신약성경의 사도들도 결국 구약성경의 의미를 해석함으로써 그 참된 의미를 도출해 내었던 것이다.

 

시편112:1-3에는, “할렐루야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계명을 크게 즐거워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그 후손이 땅에서 강성함이여 정직자의 후대가 복이 있으리로다 부요와 재물이 그 집에 있음이여 그 의가 영원히 있으리로다고 노래하고 있다. 이 본문에는 언약의 땅에 거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복과 풍요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이 나타나 있다. 그리고 그 복은 후대의 집안에 까지 미치게 됨을 약속하고 있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복과 재물이 과연 물질적 축복에 머무르는 개념인가? 아니면 적어도 물질적 개념을 포함하고 있는가?

 

시편 112편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이 받게 될 축복과 악인들이 받게될 비참한 종말을 비교하며 노래하고 있다는 사실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즉 악인들의 자손이 이 세상에서 가난하게 살게될 것을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이 본문에서 말하는 복과 부요와 재물에 대해서도 물질적인 것에 국한시킬 수 없다. 이는 메시아 예언에 속한 시편으로 이해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리고 122:5에서는 은혜를 베풀고 꾸이는 자는 잘 되나니 그 일을 공의로 하리로다고 노래한다. 이 구절에서는 이미 부유한 자가 되어 있는 상태에서 어떻게 하면 될까 하는 점을 이야기 하고 있다. 말씀은 다른 사람에게 후덕하고 편안하게 물질을 꾸어주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정당하게 대우하시겠노라 약속하고 있는 것이다. 이 말씀에서는 하나님의 자녀가 이 세상을 살면서 자기 욕심대로 살지 말 것을 요구하신다. 즉 이웃을 위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중심으로 자신을 포기하며 이웃을 긍휼히 여기는 가운데 살아가는 것이 성도의 기본적인 삶이다. 이는 가난한 이웃을 구제하며 살라고 요구하는 윤리적인 교훈이 아니다.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바라보며 살아가고 있는 성도가 가지는 당연한 삶인 것이다.

 

또한 112:9에서는 저가 재물을 흩어 빈궁한 자에게 주었으니 그 의가 영원히 있고 그 뿔이 영화로이 들리리로다고 예언적인 노래를 하고 있다. 이 말씀 역시 인간 존재는 자신을 위해 살아가는 존재가 아님을 교훈해 주고 있다. 가진 재물을 가난한 이웃과 더불어 나누었으니 그것이 결코 자신에게 손해가 되는 일이 아니었음을 밝혀주고 있는 것이다. 인간이 이 세상에 살면서 누리는 만족이나 즐거움이 값어치가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궁극적으로 공급하시는 영화로움이 훨씬 본질적인 것임을 보여주고 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백성은 이에 대한 깨달음이 있을 때 온전한 성도의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시편 112편에는 하나님께서 언약의 민족인 이스라엘 백성에게 허락하실 물질적 축복을 언약으로 말씀하고 계시는 것이 틀림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말씀을 오늘날 우리 시대 하나님을 경외하는 성도들에게 물질적 축복을 하고 계시는 것은 아니라고 이해한다. 우리는 구약성경의 말씀을 언약적 관점에서 해석해야할 필요가 있다. 예수님과 신약성경의 사도들도 결국 구약성경의 의미를 해석함으로써 참된 의미를 도출해 내었다. 따라서 시편 112편이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는 바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성도들에게 오실 메시아를 약속하신 것이다. 그가 오심으로 인해 그의 백성들에게는 모든 풍요와 부가 영원히 가득하게 되었다. 주님이 오심으로 그의 몸 된 교회에 속한 우리 성도들이 그 약속을 풍요롭게 누리고 있는 것이다.

 

2) 마태복음 19:21-26; 부자와 낙타에 대한 이해

 

예수님께서는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놀라운 교훈을 주셨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쫓으라 하시니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신대 제자들이 듣고 심히 놀라 가로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 예수께서 저희를 보시며 가라사대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19:23-26)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본문의 의미를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경우를 종종 본다. 우선 21절의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라는 말씀이 선행을 요구하는 말로 잘못 알고 있는 자들이 있다. 예수를 믿는 자들은 소유한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줌으로써 이웃 사랑을 실천해야한다는 것이다. 즉 소유한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는 행위가 온전하게 되는 조건이 된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위 본문 말씀은 그것을 말하고자 함이 아니다.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는 것이 기독교인의 일차적인 덕목임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부차적인 현상이어야 할 뿐 대화의 주된 요지는 아닌 것이다.

 

그리고 23-24절 말씀의 의미로 보아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많은 애씀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 보다도 더 어려우니라고 했으니 그만한 어떤 준비를 갖추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바늘귀를 늘리든지 낙타의 몸통을 줄이든지 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자신의 부유한 몸통을 줄여야 하므로 가난한 자들을 구제함으로써 그만큼 애써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구절은 구제나 절제를 교훈하는 말씀이 아니다.

 

또한 26절 말씀에서 하나님의 기적을 가르치는 것이라는 생각하는 자들이 있다. 부자는 과연 천국에 들어갈 수 없는가? 위의 말씀에서 부자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갈 수 없듯이 부자가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자칫 이 말씀을 하나님의 기적을 말하는 것으로 오해하기도 한다. 이는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는 말씀 때문이다. 이 말씀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불가능하지만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는 말처럼 들릴 수도 있다. 그렇다면 부자인 상태라 할지라도 하나님이 원하시면 그를 천국에 들여보낼 수도 있다는 말로 생각해 볼 수도 있는 문제이다. 그러나 이 말씀은 그런 의미라기 보다 하나님의 은혜로 인해 부자가 되는 것을 포기할 수 있다는 말로 이해하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은혜에 따라 세상의 모든 부유함을 포기할 수 있음을 말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본문의 가르침을 잘 깨달아 이해해야 한다. 21절 말씀은 세상에서 기댈만한 소망의 언덕(?)을 제거하라는 주님의 요구이다. 이 본문에서 우리가 관심을 기울여야 할 대목은 의 관계, 즉 부자청년과 예수님 사이의 관계이다. 예수님께서는 그 청년에게 너의 재산을 의지할 것이냐, 아니면 나를 의지할 것이냐?’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한다는 것을 말씀하고 계시는 것이다. 소유한 재산과 예수님 둘 다 선택하여 따를 수는 없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주님께서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라고 하신 말씀의 진정한 의미는 너의 삶을 보장할 것이라 믿으며 네가 의지하고 있는 재산을 없애버림으로써 오직 나만 의지하고 따르라는 말씀이다. 그렇게 할 때 너에게 천국의 영원한 보화가 주어지리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예수님의 그 말씀을 들은 청년은 근심하며 떠나갔다. 그가 근심한 이유는 둘 다를 선택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가 생각할 때 그 중 하나라도 버리고 싶은 마음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자기의 재산을 선택한다는 것은 사실상 주님을 선택하지 않았다는 의미이다. 누구든지 그 둘을 동시에 선택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 보다 어렵다’(23-24)는 말씀의 의미는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 어려운 것이 아니라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듯이다. 주님께서는 분명히 그렇다고 가르치고 계신다. 과연 우리는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만 할까? 그것은 단순히 어렵다는 뜻이 아니라 불가능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정말 많은 재산을 가진 사람들은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이야기인가? 만일 그렇다면 왜 많은 기독교인 가운데 부자인 사람들이 태연자약할 수 있다는 말인가? 여기서 말하는 부자란 하나님 이외에 이 세상에 의지할만한 내용들을 보유하고 있는 자들을 포괄적으로 의미한다. 하나님 이외에 이 세상에서 의미화 되어 자기 삶을 어느정도 보장할 수 있다고 여겨지는 것들을 소유한 사람들은 모두 부자들이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유형, 무형의 재산인 학벌, 능력, 직업, 명예, 권력 심지어는 건강마저도 우리의 삶을 궁극적으로 보장할 수 없다. 그러나 그런 것들이 세상에서 큰 힘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위험한 생각일 수 있다. 썩어 없어질 세상의 것들로부터 삶을 보장받으려 하는 것은 우상숭배적 사고일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바울은 그런 것들을 배설물’(3:7-9)로 여긴다고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구원은 오로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26)는 말씀은 구원이 오로지 하나님께 속했음을 말씀하고 계시는 것이다. 구원은 인간의 노력에 달려 있지 않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구원을 위해 어느 누구와도 타협하거나 의논하지 않으셨으며 자기의 기쁘신 뜻에 따라 구원을 계획하시고 이루어 가신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는 말씀의 의미가, 낙타의 바늘귀 통과 여부를 말씀하시고자 함이 아니라 구원이 하나님께 속했음을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할 수 있느냐 아니냐 하는데 관심을 가지고 계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자기 백성의 구원에 있음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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