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빈론(淸貧論)과 청부론(淸富論) -1

작성자 외마
작성일 17-09-02 07:53 | 조회 1,50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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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론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부자가 되고 싶어하며 가난하게 살기를 싫어한다. 그 이유는 죄와 경험과 욕망 때문이다. 부자가 되고 싶어하는 이유도 그렇고 가난하게 살기 싫은 것도 동일한 이유 때문이다. 우리는 그 이유를 명확히 알고 있어야만 부로 인해 교만하거나 부의 추구를 최고선으로 여기지 않을 것이며, 가난한 현실에 대해서도 비굴해지거나 그것 자체를 자랑거리로 삼지 않을 수 있게 될 것이다.

 

물질적 축복관이 주류를 차지하고 있는 한국교회 가운데서 물질관에 대한 새로운 논의가 시도되고 있는 것은 일면 다행스런 일이라 할 수 있으나 명확한 신학적 확인을 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왜냐하면 자칫 본질적인 논의를 벗어나 현상적인 문제에 매달릴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 말부터 한국교회의 목회자 생활비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었다. 서울의 대형교회의 목회자들 가운데는 일년 연봉이 수억, 많게는 수십억에 이른다는 말이 헛소문이 아님이 드러났으며, 동일한 시대 동일한 국가 안에서 목회를 하고 있는 어떤 목회자들은 연봉 천만원에도 훨씬 못미치는 생활비를 받고 있다는 점을 고려할 때 목회자들 사이의 빈부격차는 심각하다고 할 수 밖에 없다.

 

결국 그로 인해, 청빈론에 대응하는 말로서 청부론이라는 신조어까지 등장하여 논쟁이 되고 있는 것이다. 청부론이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돈을 많이 벌어 부자로 살면서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논리이다. 그러나 성경의 본질적인 면을 간과한 그에 대한 논의는 엉뚱한 다툼에 머물뿐 아니라 일부 교인들에게 예기치 않은 명분만 제공할 위험마저 있다. 즉 부유한 사람들이 자신의 부를 하나님의 축복이라 여기거나 그것을 바라는 사람들에게 신기복주의 사상에 빠져들게 하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성경은 물질에 대하여 어떻게 가르치고 있는지 점검해 보고자 한다. 이를 위해 한국 기독교인들의 일반적인 물질관과 구약성경 중 시편112편 및 마태복음에 기록된 두 본문(19:21-26; 6:24)에 대한 주해, 그리고 성경에서 교훈하는 물질관과 성도의 자세를 살펴봄으로써 주제에 대한 논의를 시도해 보고자 한다.

 

 

2. 한국 기독교의 일반적인 물질관

 

한국 기독교인들의 물질적 축복관에는 문제가 많다. 예수를 믿으면 사업이 잘되고 부자가 될 것이라는 가르침은 한국 교회 가운데 어느 정도 일반화 되어 있다. 한편으로는 청빈을 이야기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부자가 되기를 바라는 것은 이율배반적일 수 밖에 없다. 부자이면서 그것이 불편해 가난한 채 하기도 하고, 반대로 가난하면서도 그것이 자존심이 상해 부자인체 하기도 해야 하는 우리의 형편을 부인할 수 없다. 따라서 겉으로는 청빈을 이야기 하면서 속으로는 물질적 축복을 강조하는 한국교회의 이율배반적인 가르침에 대해 본질적인 새로운 해석이 필요하다. 기독교인인 우리 역시 다 부자가 되고 싶어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므로 신앙을 통해 물질적 축복을 받기 원하는 것이다. 부자가 되어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고 좋은 일을 많이 하겠다는 것이 어린 성도들의 소박한 이유일 것이다. 그러한 마음을 가지는데 대해서는 예외가 없으리라 생각한다.

 

뿐만 아니라 구약성경에는 물질적 축복을 받은 많은 사람들이 있다고 가르치는 지도자들도 있다. 아브라함의 가족이나 다윗의 가정은 물질적 축복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가르침은 성경의 가르침을 잘 못 이해하고 있는데서 출발한다. 사실 그러한 가르침과 사상들이 기독교의 물질적 축복관을 정당화시키는 요인이 되고 있다.

 

한국교회의 한편 저변을 차지하고 있는 청빈사상은 순수한 기독교 정신이 아니라 중세 수도원 전통과 유교에서 온 통합적 개념이다. 기독교에서는 의도된 청빈을 장려하지 않는다. 종종 기독교 지도자들 가운데 청빈하게 산다고 하는 이들을 보지만 그것은 엄청난 부자들만이 할 수 있는 일종의 특권일 따름이다. 가진 집이 없고 재산이 없는 것만으로 청빈한 삶이라 할 수 없다. 수중에 돈이 없어도 언제든지 누군가로부터 대접받을 만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을 청빈한 삶과 관련짓는 것은 무리이다. 우리 주변에도 무소유를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가끔 있다.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무소유가 청빈인가? 그런 무소유의 생활을 하려면 엄청난 부자가 아니면 흉내낼 수 없는 일이다. 필자는 이러한 무소유를 낭만적 무소유라 일컫는다. 그런 식으로 전면에 제시된 무소유 뒤에는 엄청난 부가 존재하여 그 무소유를 강력하게 뒷받침 하고 있다. 그들은 소유한 재산이 없을지 모르지만 남들과는 도저히 비교조차 되지 않는 엄청난 재능과 능력을 배경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린 성도들 중에는 그것이 마치 실제적인 무소유인 것처럼 이해하기도 한다. 그래서 그런 자들을 존경하기도 하며, 목회자들을 비롯한 기독교 지도자들은 재산이 없어야 한다고 막연히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결코 가난이 곧 미덕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한국교회의 물질관 중 특이한 부분이 있다. 그것은 청빈사상이 일반적으로 목회자들이나 소위 지도급 인사들에게만 요구된다는 사실이다. 일반 성도들이 청빈하게 살아야 한다는 개념은 지극히 희박한데 반해 목회자들은 청빈하게 사는 것이 미덕이라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지도자들이 무책임한 경제활동을 하도록 조장하는 위험한 생각일 수 있다. 목회자들도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일상적인 삶에 있어서 다른 사람들과 차이나는 것이 전혀 없다. 그들도 남들처럼 부양해야 할 가족이 있으며 의식주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그러므로 목회자도 부자가 되기 위한 재산 축적이 목적이 아닌 범위 안에서 건전한 경제생활을 해야하며 저축도 해야 한다. 그래야만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웃이 있을 때나 자녀교육, 개인적 용도 등을 위해 필요에 따라 그 물질을 적절하게 사용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일부 목회자들이 그러하듯이 물질이 생길 때 마다 좋은 일을 한다며 주머니를 다 털어버리는 것은 지극히 무책임한 행동이다. 항상 빈주머니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올바른 물질관을 소유한 사람의 삶의 태도라 볼 수 없다. 그런 삶을 살다가 보면 정말 자신에게 돈이 필요할 때 누군가가 돈을 채워주기를 바라는 잘못된 마음을 가지게 된다. 그러다가 돈이 생기면 하나님이 채워주신 것이라며 미성숙한 신앙적 자기 합리화를 꾀하게 되는 것이다. 한국 기독교식 청빈이란 정말 찌들고 가난하여 먹고 살기조차 어려운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말이 아니라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부자가 될 수 있는데도 부자로 살지 않는 사람을 일컫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이미 가난한 사람이 아니다.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그런 자들의 청빈이란 부자 이상의 부자라 해도 될 것이다.

한국이 경제적인 발전을 하고 한국의 많은 성도들과 교회가 국가 경제와 맞물려 부유하게 됨으로써 그것을 하나님의 축복인양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게 되었다. 그러나 성도가 부유하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축복이라 생각하는 것은 가난한 많은 성도들을 하나님의 은혜와 무관한 자로 만들어 버리게 된다. 최근들어 회자되고 있는 청부론은 곧 깨끗한 부자를 중심에 둔 개념이다. 기독교인이 성실하게 열심히 일하면 부자가 될 수 있다는 주장을 포함하고 있다. 그런 생각은 성경의 구체적인 교훈과 실례들을 전반적으로 고려하지 않은 주장이다. 성경에는 신앙생활을 잘 한 사람을 하나님께서 부자로 만들어 주신 예를 거의 찾아볼 수 없다. 하나님을 잘 믿었기 때문에 부자가 된 것이 아니라 부자이던 사람이 주님을 믿게 된 예들은 종종 나타난다. 아울러 성경에는 신앙을 버리고 이방인처럼 제멋대로 살았던 사람들 중에 부자가 되고 성공한 예들이 많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하나님의 큰 은혜를 받았기 때문에 고등교육을 받아 그럴듯한 직업을 가지게 되어 남부럽지 않은 가정을 이룩하게 되었다고 주장한다면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이야기해야 할까? 학교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해 변변한 직업을 가지지 못해 어려운 경제적 여건 가운데 살아가는 성도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못한 사람들일까? 가정생활에서 안락한 행복감을 누리지 못하는 성도들은 하나님의 은혜가 없기 때문이라 해도 좋을까? 만일 누군가 그런 생각을 한다면 그것은 자기중심적 사고일 따름이다.

 

부자가 되어 좋은 일을 많이 하며 살겠다는 것은 그럴듯한 생각이기는 하나 그것 역시 자기 욕심의 발로일 수 있다. 돈을 많이 벌어 선행을 하며 살겠다는 것은 자기인생을 위한 치장논리 이상 되지 않는다. 열심히 일한 결과로 깨끗한 부자가 되어 세상에서 훌륭한 일을 함으로써 존경받고 만족을 누리며 사는 것이 바람직한 삶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지극히 위험한 생각이다. 결국 그 부유함은 이 세상을 살만한 즐거운 공간으로 이해하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세상에서 출세하고 성공하는 것이 마치 성도의 삶의 의미를 표현하는 한 방편이 된다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의 외적인 성공이나 출세는 교회 가운데서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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