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와 기독교(2)

작성자 외마
작성일 17-08-19 20:02 | 조회 23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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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지난 2천년 동안 단 한 번도 제대로 이해받지 못했습니다. 그 중요한 원인은 예수의 정신이 너무나 급진적이며 현대적이었다는 것입니다. 예수의 정신엔 사회주의, 여성주의, 생태주의, 아동인권을 비롯한 인류가 현대에 들어서야 깨달은 여러 소중한 정신들을 내포하고 있었습니다. 이를테면 예수님을 둘러싸고 그를 쫓는 무리와 일행엔 언제나 여성들이 여럿 포함되어 있습니다. 되짚어 보건데, 인류 역사의 어떤 현인이나 종교 창시자도 여자를 일행에 포함시킨 일이 없습니다. 20세기 초만 하더라도 여자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아직도 중근동의 여러 나라들은 그들의 종교적, 사회적 전통을 내세워 여성의 인격을 인정치 않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2천 년 전에 그 척박한 근동의 땅에서 여자들과 동행했고 여자 가운데서도 가장 천한 성매매 여성과 인격적으로 교우했습니다. 예수의 그런 행동이 사람들을 얼마나 당혹스럽게 만들었을지 그 사회에 얼마나 큰 충격을 주었을지 잘 생각해보십시오. 오늘 기독교인은 과연 어떤 행동으로 사회에 당혹감과 충격을 주고 있습니까?

기독교는 예수의 정신을 되찾아야 합니다. 이기심과 사적 소유를 기반으로 한, 땀 흘려 같이 일하고도 남보다 수 천, 수 만 배의 돈을 벌어들이는 사람이 존경받는, 계급적 착취와 제국주의적 착취가 공공연한, 사랑이나 존경까지도 돈으로 매매되는 자본주의는 기독교인뿐만 아니라 전 세계인들에게 말 그대로 악마의 사회체제입니다. 그래서 막스 베버(Max Weber)는 이를 두고 천민자본주의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이른바 정부의 간섭을 대폭 줄이자는 작은 정부국제적인 자본이동의 자유화를 내세우는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진행되면서 자본주의는 초기 자본주의의 야만으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신자유주의 세계화는 80년대 말 자본주의의 강력한 경쟁자이던 동구 사회주의들이 몰락하면서 더 빠르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지금 인류를 나락으로 떨어트리고 있습니다. 소위 양극화라고 부르는 빈부격차는 급속하게 벌어지고 그 격차는 좁혀질 수 없을 정도로 견고합니다. 국가 간, 뿐만 아니라 기업과 개인 간에도 이윤을 차지하기 위해선 도덕도 윤리도 없이 공공연한 침략전쟁도 불사합니다. 그런데 교회는 그런 현실에 대응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대응하기는 커녕 오히려 그에 부응하고 있습니다. 그런 현상이 가장 강한 교회가 바로 한국의 교회입니다. 한국 교회가 이렇게 된 배경은 흔히 미국식 근본주의 기독교’, 말하자면 지금 트럼프 일당이 믿는 그런 기독교가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맞는 얘기지만 보다 더 결정적인 배경은 세계 교회사에서 유례가 없다는 이른바 한국교회의 놀라운 부흥사와도 관련이 있습니다. 한국교회의 놀라운 부흥은 주로 고 박정희 전 대통령의 개발 파시즘 기간 동안의 일입니다. 물론 그건 시간상의 우연한 일치가 아닙니다. 한국교회는 개발 독재의 가장 충직한 선전선동 장치였습니다.

 

믿으면 받는다.” 라는 한국 교회의 설교는 하면 된다.” 라는 개발 독재의 구호와 일치했습니다. 한국 교회의 무조건적 반공주의는 민주주의적 의견을 빨갱이로 몰아붙이는 독재 권력의 행보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결정적인 기여를 했습니다. 또한 교회는 사람들의 자연스런 저항의식을 배설하게 하는 공간이었습니다. 관제 행사가 아니라면 여럿이 모이는 일조차 불편하던 시절, 교회는 사람들이 마음껏 소리치고 교제할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었습니다. 특히 파시즘이라는 사회적 억압에다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는 식의 전근대적 가부장제에 시달리던 여성들에게 교회는 그야말로 해방의 공간이었습니다. 게다가 믿으면 남편도 자식도 잘된다는데 당시 여성들에게 그보다 더한 가치가 어디 있겠습니까. ‘아줌마들은 교회 부흥의 돌격대가 되었습니다. 이 두 가지 사실(무조건적인 반공주의와 치맛바람)은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반대시위에서 뚜렷이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한국 교회의 놀라운 부흥사는 그렇게 씌어졌고 오늘 한국 교회는 성도가 몇 천 명, 몇 만 명이 모이는지, 예배당이 얼마나 높고 큰지, 한 해 교회재정의 규모가 얼마인지, 성도 중에 유명인사와 부자가 얼마나 있는지가 무엇보다 중요한 지표로 작용되어지는 물질적 부요함만이 축복으로 이해하는 세계에서 가장 저급한 신앙관을 자랑하게 되었습니다. 한국 대형교회의 성장사는 실제로 한국재벌의 성장사와 아주 닮아있습니다.(기업에 개인적 실적표가 붙어있듯이 교회는 전도실적표가 막대그래프로 붙어있고, 성과를 내지 못하는 부교역자는 조용히 사라집니다.) 그렇다면 한국교회는 교회라기보다 기업이라고 부르는 것이 맞을 수도 있겠습니다. 90년대 이후 우리 사회는 독재권력이 물러나고 민주화와 개혁이 진행되었지만 독재권력이 있던 자리를 대신 자본이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자본의 지배는 파시즘의 지배처럼 폭력이나 억압을 통한 게 아니라 사람들에게 자본의 달콤한 욕망을 심어주어 스스로 복종하게 하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돈이면 뭐든 다 된다는 생각을 심어주어서 사람들이 돈으로 요술을 부리는 맘몬 앞에 무릎 꿇게 만드는 것이지요. 인간적이고 품위 있는 세상에 관심을 갖기 보다는 부동산과 통장 잔고에 집착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교회는 새로운 지배자에게도 준비된선전선동 장치입니다.

 

제가 한국 교회를 욕하고 있지만 한국 교회에는 예수의 삶을 본받으려는 세계 교회사에 중요하게 기록될 만한 소중한 실천들도 존재했습니다. 70년대와 80년대 초에 모든 사회운동의 중심에 진보적인 교회가 있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런 정신을 갖는 교회는 이제 거의 없습니다. 이젠 거의 모든 교회가 하나님 대신에 돈을 섬깁니다. 오늘 대개의 한국교회는 교회가 아니라 교회를 가장한 기업체들일 뿐입니다. 그 살벌하던 파시즘 시절에도 살아있는 교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젠 거의 없습니다. 파시즘보다 자본의 신이 기독교인에게 더 무서운 적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자본주의 사회는 예수가 살던 2천 년 전 유대사회처럼 단순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차별과 착취는 언뜻 알아보기 어려운 복잡한 구조로 되어있고, 신문이나 방송 같은 주류 미디어와 여론을 가장한 온갖 이데올로기 공작, 특히 지배체제의 손바닥 안에서 놀아나는 네티즌의 활약은 그 복잡한 구조를 한 번 더 덮어 버립니다. 깊고 뜨거운 신앙심이나 영적 신령함이 그 구조를 자동으로 보여주진 않습니다. 자본주의를 들여다볼 수 없다면 예수의 삶을 실천할 방법도 없습니다. 오늘 기독교인에게 자본주의에 대해 공부하는 일은 성경 공부만큼이나 중요합니다. 부동산이나 주식 같은 공부를 말하는 게 아니라 이놈의 자본주의가 대체 사람들의 피를 어떻게 빨아먹고 있는가, 우리의 신앙을 어떻게 파괴하고 있는가를 공부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은 예수가 정치적 박해를 받았다는 사실, 예수가 당대 지배체제와 대결했다는 사실에 정직해야 합니다. 그 대결의 방식에서 나타나는 비폭력성만을 편의적으로 발췌하여 예수의 급진성을 모호하게 만들어선 안 됩니다. 교회가 다 돈을 섬기게 되었다고 말했는데 돈 대신에 다른 걸 섬기는 교회도 있습니다. 바로 내 마음을 섬기는 교회입니다. 그런 교회의 목사님과 신도들은 다 온화하고 도사들 같습니다. 옷 단정하게 입고 세속을 떠난 사람들처럼 어지러운 세상 중에 손 높이 들고 주님께서 가는귀가 먹으신 것 모양 꼭 세 번 크게 부르짖고는 큰 소리로 기도합니다. 그들은 예수 흉내를 내지만, 그 폭력의 현실과 내 형제의 고통을 초월하고 있다는 점에서 역시 예수를 팔아먹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예수가 단 한 번도 현실을 떠나거나 초월한 어떤 가치를 말한 적이 없다는 것을 되새겨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가 이 천박한 자본주의 세상에 살았다면 어떻게 했을까 늘 고민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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