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목주의적 신앙(blind faith)이 교회를 죽이고 있다.

작성자 외마
작성일 17-09-22 15:15 | 조회 4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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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보면 순진한 것인지 아니면 지혜롭지 못한 것인지, 또 어찌 보면 의리가 있는 것인지 아니면 우매한 것인지 모를 사람들이 우리나라 사람들의 성품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다. 정치현장이나 국회 그리고 각 종 집회에서 보더라도 이성적이고 지혜로운 문제해결과 협의과정은 눈을 씻고 찾아볼래야 찾아 볼 수 없이 오직 장터에서나 볼 수 있는 큰 목소리에 따라 몰려다니는 맹목주의들만 난무 하는 것 같아 안타깝기가 한량이 없는데 역시나 시선을 교회로 돌리면 그 곳의 상황도 자못 심각하다.

 

목회자들은 동문과 교단이라는 의리와 패거리주의로 인해 개혁자들의 모토인 5 Sola는 무색한지 제법된 것 같고 성도들은 목회자를 맹신하고 잘못 전하는 바를 맹목하여 따름으로 한국교회의 수준을 후퇴시켜 놓았다는 비판에 절망스럽게 직면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기독교 신앙에는 이성과 논리를 이용하여 증명해 내거나 설명할 수 없는 체험적인 요소와 신비적인 요소가 분명히 있다. 보통 교회용어로 하나님과의 인격적 만남이라고 지칭하는 개인적 회심을 경험하고, ‘기도의 응답을 통해 하나님의 실존을 체험하기도 한다. (비기독교인이 그런 체험을 심리적인 착각이나 합리화라고 비난하더라도 어차피 개인의 체험의 영역이니 논쟁은 무의미하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이 원시적인 기복신앙과 다른 점은 그런 사사로운 체험이나 자신의 욕망을 투사한 바람기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객관적으로 실존하는 신의 음성, 계시’(Revelation)하나님의 말씀성경을 통해 지금도 신앙인들에게 임하고 있고, 그 계시를 통한 교제와 소통이 가능하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 정통과 이단을 구분하는 기준도 신의 계시인 성경의 교리적, 신학적 해석의 범주가 정통적인 해석에서 벗어나느냐, 그렇지 않느냐로 정통과 이단을 구분한다. ‘체험의 영역으로만 기준을 세우면 정통과 이단은 구분할 길이 모호해진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현대 기독교인들의 보편적인 모습과 계시를 중시하는 이성적인 기독교의 원리 가운데 뭔가 어울리지 않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이상하게도 주변에 신앙이 독실하다고 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 계시 의존적이라기보다 체험 의존적(empiricism)’이며, ‘합리적이라기보다 맹목적(blindness)’이고, ‘지성적이라기보다 반지성주의적(meatballism)’인 모습을 많이 보인다.

 

원래 계시의 중요성을 인정한다면 계시를 분별하는 합리적인 이성을 그렇게 무시할 수는 없지 않을까? 게다가 성경구절을 외우는 것은 잘하지만 성경을 읽다가 이해가 안가거나 난해한 구절에 대한 설명을 요구하면 대부분 이런 대답이 돌아온다.

 

그건 네가 믿음이 없어서 그래! 일단 믿어봐. 믿으면 다 이해가 가!”

 

게다가 성경에 대해 그리 해박하게 잘 아는 것도 아니다. 그저 문자적으로만 성경을 달달 외우고 있거나, 중요한 구절들을 주제별로 암송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요즘 젊은 기독교인들은 사실 이 정도의 성경암송조차 못하는 사람이 태반이다.

 

종교마다 비슷한 양상을 보이는 부분이 있지만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미덕으로 추앙받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순종이다. 그것도 지성이 차단된 순종

 

그래서 교회는 성경에 관한 것이든, ‘교리와 신학에 관한 것이든, ‘교회의 문화와 제도에 관한 것이든 어떤 질문도 용납되지 않는 문화가 있다. 조금이라도 꼬치꼬치 캐묻거나 따져 물으면 바로 불온한 신앙을 갖고 있는 신자로 찍히거나 귀찮은 존재로 여겨지곤 한다. 아니면 교회를 흔드는 불순한사람으로 찍혀서 요주의인물이 되고 만다.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의 소통과 교제를 믿고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소통)’하는 것을 믿는다고 사도신경을 매 주마다 외우는 교회가 가장 소통하기 어려운 불통의 문화가 있다는 것이 아이러니하지 않은가? 필자는 이런 교회와 기독교 문화의 원인에 뿌리 깊은 반지성주의가 있다고 생각한다.

재미있는 것은 한국 개신교는 어느 종교랑 비교해 봐도 압도적일 만큼, 교리와 말씀, 지성의 활용을 강조한다는 것이다. 근데 왜 이렇게 되었을까?

 

그것은 교회에서 요구하는 지성과 이성의 활용이 철저히 일방적이며, ‘회의의문을 용납하지 않고, 다른 해석이 용납되지 않는 단 하나의 해석만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절대적인 진리가 훼손된다고 믿기 때문이 아닐까? 그런데 문제는 그들이 주장하고 가르치는 일방적인 진리, 의문과 질문을 허락하지 않는 절대적 교리라는 것이 도리어 다른 어떤 경험이나 가치보다 ‘(검열된) 이성의 능력을 과신하는 모순된 태도에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기독교의 반지성주의는 지독한 이성주의에 대한 맹신에서 비롯되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성은 양쪽 눈을 가리 우고 한쪽 방향의 트랙만을 달리게 통제하는 경주마와 같지 않다. 일단 인간의 이성은 제대로 작동되기 시작하면 모든 것을 회의의 영역에서 처음부터 검토하고 과연 내가 지금까지 듣고 배운 것이 그러한가를 알아보도록 작동한다. 마치 베뢰아 사람이 그러했던 것처럼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사도행전 17:11)

 

그러나 일반적으로 대다수 교회에서는 이성의 이러한 자유로운 작동을 통제하는 것부터 가르친다. 잘못된 방향으로 이성이 흘러가면 위험해진다는 명목으로 말이다.

 

만일 정말로 그토록 위험하다고 여긴다면, ‘왜 위험한지를 합리적으로 설명해서 납득시키면 그나마 나을 것인데, 사실 그렇게 가르치는 목사나 교사, 리더들 조차 그들이 소위 위험하다고 여기는 그 방향의 사상이나 신학, 교리적인 얼개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어서 왜 위험한지 설명을 제대로 못한다. 그래서 마치 눈 곱 만큼의 얄팍하고 피상적인 몇 가지 단어와 개념만으로 아주 쉽게 적과 아군’, 또는 신앙적으로 안전한 것과 위험한 것을 구분 짓는다. 그래서 그런 교회 문화에서 유독 많이 들리는 말이 위험하다라는 표현이다.

 

필자가 보기엔 자신의 얄팍한 이론과 경험의 잣대로 하나님을 재단하는 그들이 가장 위험해 보인다.

 

신앙에 있어 이성과 교리의 역할이 그토록 중요하다고 가르치는 개혁교회들이 이런 문화를 계속해서 계승하며 퍼뜨려 나가고 있다. 그리고 이런 문화는 얼마간 먹혀들어간다. 특히 신앙이 어릴 때나 어려운 개념을 이해하지 못하는 초신자일 때는 너무나 명쾌하고 단순한 교리와 가르침이 더욱 매력적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그리고 상당히 많은 신자들은 신앙연차가 오래되어도 그 수준에 만족하며 머무른다. 성경도 안 읽거나(또는 아무런 주석이나 해설 없이 성경만 읽거나), 또는 신앙서적을 거의 안 읽기 때문에 아무런 불편함이 없다. 교회 셀모임이나 구역모임에서 성경을 제대로 깊이 있게 가르치는 리더나 간사가 몇 명이나 될까?

 

대부분은 성경공부는 양념이고 한주간의 삶을 나누자는 명목으로 서로의 일상적인 신변잡기나 기도제목을 나누고 끝나고 만다. 극소수의 리더와 간사들은 열심히 준비하기도 하지만, 문제는 너무 진지하게 열심히 준비해서 학구적으로 접근하면 팀원들이 또 지루해하고 듣지 않는다. 그러니 구역과 셀의 경건을 함양하기 위해 모인 모임은 뒷 담화 토크쇼자리로 변질되고 마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그런 피상적 앎의 상태에 머무는 것으로 만족하는 교인들이 상당수이기에 한국교회와 교인들이 대체로 맹목적 반지성주의에 물든 것이겠지만, 다 그런 것은 아니다. 머리가 점점 커지고, 신앙이 자라고 신앙생활의 경험이 풍부해지면서, 근본적으로 성경과 하나님에 대해 깊이 있게 알아가고 싶어 하는 교인들 또한 적지 않다. 그리고 그들은 대부분 교회 안에서 자신들의 배움의 열정을 충분히 채워줄 수 없음을 매번 체험하고 절망해 간다.

 

그러면서 목사들과 교인들 몰래 숨어서 이른바 불온서적(?)에 해당하는 자끄 엘륄이나 톰 라이트의 책등을 읽어가며 희열과 쾌감을 느끼며, 그 필요를 채워줄 수 없는 교회와 목사에 절망하다 결국 떠나간다. 가나안 교인(교회를 안 나가거나 이 교회 저 교회를 떠돌며 방황하는 교인)들이 점점 많아지는 현상의 이면에는 이런 뿌리 깊은 교회의 반지성주의 문화가 한 원인이지 않을까?

 

보수적 기독교에 헌신된 교인들은 자신이 반지성주의라고 하면 기분나빠하며 인정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프란시스 쉐퍼‘C.S 루이스같은 작가가 쓴 기독교 변증서나 창조과학회같은 단체의 자료들을 활용하면서 성경이 말하는 세계관이 역사적으로나 과학적으로 맞다는 것을 논리적으로 설명하려는 사람 또한 적지 않으니까.

 

그러나 신앙을 이성으로 설명해내려는 기독교 변증이 신앙에 있어서 바람직한 이성의 활용의 전부라고 생각하는 편견은 논외로 하더라도 기독교의 뿌리 깊은 반지성주의가 위험한 진짜 이유는 따로 있다.

 

바로 기독교 신앙 안에 침투한 반지성주의는 인간의 마음 속 뿌리 깊은 욕망과 탐욕을 견제하는 기능을 상실하게 한다는 것이다. 인간의 마음속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그리 단순하거나 간단하지 않다. 게다가 우리의 마음은 우리 자신을 아주 쉽게 기만하곤 한다. 그래서 성경에서도 이렇게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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